파나마 세계청년대회 파나마 세계청년대회 

교황, WYD 폐막미사 “젊은이들은 ‘대기실’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은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재입니다.” 1월 27일 파나마 세계청년대회 폐막미사에 참례했던 약 70만 명의 청년들에게 교황은 이같이 말했다. 이 폐막미사에는 파나마,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과테말라, 온두라스, 포르투갈 등의 대통령들도 함께했다.

번역 이창욱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0-21).

이와 같이 이날 복음은 예수님의 공적 사명의 시작을 소개해줍니다. 지인들과 이웃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어쩌면 그분에게 율법을 가르쳤던 어린 시절 그분의 “교리 교사”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분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봤던 회당에서 이를 소개하셨습니다. 그 공동체 중심에서 성장하셨고 교육받으셨던 스승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 그분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하느님의 꿈을 선포하고 실현하기 위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선포하셨던 말씀은 단지 미래에 대한 약속 같은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입에 담으신 말씀은 현실을 실현시키며, 오로지 현재에 대해서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그분의 지금에 참여하도록 부르시기 위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하느님의 지금(l’adesso di Dio)을 계시하십니다. 이 하느님의 시간에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참조). 예수님과 더불어 현재가 되고, 얼굴이 되며, 살이 되고, 자비의 사랑이 되는 하느님의 지금입니다.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이상적이거나 완벽한 상황을 기대하지 않으시고, 그 실현을 위한 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순간입니다. 그분은 모든 상황과 모든 공간을 적절한 기회로 만드시는 하느님의 때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시작해서 약속된 미래는 삶이 됩니다.

언제입니까? 지금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모든 이들이 초대받거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나자렛의 모든 이웃이 그토록 기대했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들을 초대했고, (그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봤으며, 알고 지냈던 누군가를 믿을 준비를 갖추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

우리에게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만큼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그토록 친근하고 현실적인 분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 친구, 가족처럼 알고 지내던 어떤 사람을 통해서 (그분께서) 행동하시고 나타나신다는 것을 항상 믿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당신 나라를 위해 일하고 그분과 함께 손을 더럽히도록 우리를 초대하실 수 있음을 항상 믿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구체화되고 그분의 모든 고통스럽고 영광스러운 변화와 더불어 역사 안에서 거의 경험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교리 교육, 2005년 9월 28일 참조).  

멀리 계신 하느님을 선호할 때, 나자렛의 이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런 하느님은) 아름답고, 좋으시며, 관대하시고, 잘 묘사된 분이시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와) 거리가 있는 분이시고, 특히 폐를 끼치지 않는 분, “길들여진(addomesticato)” 하느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가깝고 일상적인 하느님, 친구요 형제인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일상성과 특히 형제애를 배우라고 요청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천사적이거나 구경거리가 되는 방식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형제적이고 친구 같은 모습, 구체적이고 친근한 모습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은 실제적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실제적인 분이시고, 사랑은 구체적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구체적인 분이십니다. 이러한 “사랑의 구체성은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를 구성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강론, 2006년 3월 1일).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복음이 구체적인 삶이 될 때, (예컨대) “그런데 이 아이들은, 마리아, 요셉의 아이들, 누구누구의 형제들이 아닌가? (...) 누구누구의 친척이 아닌가? (...) 우리가 자라도록 도와줬던 소년들이 아닌가? (...) 쉿, 조용히 해, 저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저 아이는, 항상 축구공으로 유리창을 깨뜨렸던 아이가 아닌가? (...)”라고 수군대기 시작할 때, 우리 또한 나자렛 사람들과 동일한 위험을 무릅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예언과 선포가 실현되기 위해 태어나신 분이 길들여지고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길들이고 싶어하는 것은 매일 (우리가) 겪는 유혹입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의 사명, 여러분의 소명, 심지어 여러분의 삶이 오직 미래를 위해 가치가 있고 현재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마다,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치 청년이라는 것이 자신의 때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을 위한 “대기실”과 동의어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 시간이 (실현되는) “동안”, 위생적으로 잘 포장되고 아무런 결론 없이, “아주 확실하게” 잘 구성되고 보장된 미래를 우리가 여러분을 위해 만들거나, 혹은 여러분 스스로 만듭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실험실 같은 미래를 제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오늘의 기쁨, 구체적인 기쁨, 사랑의 기쁨이 아니라, 기쁨의 “위선”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소란을 피우지 않도록, 너무 물의를 일으키거나,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도록, 여러분 자신과 우리를 문제 삼지 않도록, 이처럼 이런 기쁨의 위선을 통해 여러분을 “안심시키고”, 여러분을 잠재우는 겁니다. 아울러 이 “잠시 동안(frattanto)” 여러분의 꿈은 제 몫을 잃게 되고, 질질 끌려가게 되며, 잠들기 시작하며, 작고 슬픈 “환상”이 되고 맙니다(주님 성지주일 강론, 2018년 3월 25일 참조). 이것은 다만 아직 여러분의 지금(adesso)이 아니고, 내일을 꿈꾸고 건설하는 데에 참여하기에는 여러분이 너무 젊다고 우리가 생각하거나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우리는 계속해서 여러분을 후순위로 미룹니다. (...)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을 아십니까?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것을 좋아한다는 겁니다. 제발, 이런 것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반응하고, 하느님의 “지금”을 살고 싶어 하도록 그들을 도와줍시다.

최근 주교 시노드의 결실들 가운데 하나는, 만날 수 있는, 특히 경청할 수 있는 풍요로움이었습니다. 세대 간 경청의 풍요로움, 교류의 풍요로움과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오늘부터 내일을 꿈꾸며 건설하는 데에 참여하는 채널과 공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인식의 가치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공동으로 한 공간을 조성하면서, 고립되지 말고 일치해야 합니다. 이 공간은 선물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복권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여러분이 투쟁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삶은 오늘이기 때문에, 젊은이 여러분은 여러분의 오늘이라는 공간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에게 내일이라는 날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오늘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도 오늘이며, 여러분의 공간도 오늘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은 미래가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은 미래입니다. (…)”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만, 아닙니다. 여러분은 현재(presente)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미래가 아닙니다. 젊은이 여러분은 하느님의 지금(l’adesso di Dio)입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이 자리에) 불러모으시고, 여러분을 여러분의 공동체로 부르시며, 할아버지 할머니, 어르신들을 찾아 뵈러 가도록 여러분의 도시에서 부르십니다. 일어서서 그들과 함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꿈꾸게 하신 그 꿈을 실현시키고 그 말씀을 듣도록 (부르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참조)라는 말씀처럼, 지금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여러분의 상상을 지배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연관시킬 것입니다. 아침에 여러분을 일어나게 만들고, 피곤한 순간에 여러분을 자극하는 것이 될 것이고, 여러분의 마음을 찢어버리고 그곳을 경이로움과 기쁨과 감사로 가득 채워주는 것이 될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의 소명을 가졌다고 느끼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되며, 모든 것이 이것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페드로 아루페 신부, ‘더 이상 실천적인 것은 없다(Nada es más práctico)’ 참조).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지만,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만일 사랑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다면, 모든 것이 부족할 것입니다. 오늘 사랑의 열정!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해주시고 내일을 향해 인도해주시도록 맡겨 드립시다!

예수님께는 “잠시 동안(frattanto)”이라는 것이 없으며, 마음속을 관통하고 정복하길 원하시는 자비로운 사랑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보물이 되시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삶에서 “잠시 동안”이나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놓도록 초대하시는 증여의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구체적인 사랑, 가깝고, 실제적인 오늘의 사랑이십니다. 두려움과 소외, 억측과 조작 때문에 마비된 사람들과 마비된 수많은 눈길 앞에서 희망과 사랑, 연대와 형제애의 경이로운 낚시에 참여하도록 선택하며 발생하는 축제 같은 기쁨입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과 그분의 사명은 스쳐 지나가는 무엇이라거나, 우리 삶에서 “잠시 동안”이 아니며, 단순히 세계청년대회만도 아닙니다. 걸어가기 위한 오늘 우리의 삶입니다!

이 기간 동안 내내 배경음악처럼 특별히 우리를 동행해주었던 것은 바로 마리아의 피앗(Fiat, “네”라는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과 그분의 약속을 그저 가능한 무엇으로 믿으셨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으셨고 주님의 이러한 지금에 참여하시기 위해 “네”라고 말하는 용기를 지니셨던 것입니다. 하나의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셨고, 사랑에 빠지셨으며, 이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도 한 가지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고, 사랑에 빠질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맡겨 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결정하실 겁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당신의 벗들과 지인들 앞에서 다시 일어서시고 예언서를 드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그분의 확실한 사랑을 살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지속적인 “네”라는 응답이 그 사랑에 이르는 문이 될 것입니다. 이로써 성령께서 교회와 세상에 새로운 성령강림을 선사하실 겁니다. 그렇게 되기를 빕니다.

27 1월 2019, 1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