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아무도 직업을 잃어선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1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에서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아 모든 노동자가 정당하게 임금을 받고, 노동의 존엄과 휴가의 권리를 누릴 수 있길 기도했다. 교황은 강론에서 인간이 노동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한편,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인간의 존엄을 짓밟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세상에서 노동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맞서 싸우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VATICAN NEWS / 번역 안주영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1일 금요일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아 성령께 봉헌된 산타 마르타의 집 성당에서 ‘이탈리아 그리스도인 노동자 협회(Associazioni cristiane dei Lavoratori italiane, ACLI)’에서 모셔온 노동자 요셉 성인상과 함께 아침미사를 봉헌했다.  

“오늘은 ‘노동자 성 요셉’ 축일이며 세계 노동절입니다. 모든 노동자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합시다. 어느 누구도 일자리를 잃지 않고, 모든 노동자가 정당하게 임금을 받으며, 노동의 존엄과 휴가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교황은 강론에서 이날 제1독서인 창세기의 구절을 해설했다(창세 1,26-2,3). 제1독서는 하느님이 당신과 비슷하게 당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교황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의 활동과 일을 맡겨 주셨다며, 이는 인간이 당신과 협력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인간의 노동은 하느님에게 받은 소명이고 인간은 노동을 하며 하느님을 닮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노동을 통해 창조의 능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노동은 존엄을 부여합니다. 그런데 역사 안에서 (노동의) 존엄이 얼마나 짓밟혔는지요. 오늘날에도 수많은 (형태의) 노예들이 존재합니다. 생존을 위한 노동의 노예, 곧 강제 노동, 부당한 임금으로 노동의 존엄이 짓밟힙니다. 인간의 품위 또한 빼앗깁니다.” 교황은 우리 주변에도 장시간 일하고 최저 임금 밖에 받지 못하는 일용직 노동자, 사회보장보험 가입이나 연금 혜택 없이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가사 도우미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사례가 우리 주변에도 벌어지고 있다는 경고다. 교황은 노동자들에게 행하는 모든 불의가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또한 이날 세계 노동절을 기념하며 노동 정의를 실현하고자 투쟁하는 이들을 위해 신자든 비신자든 많은 이들이 일치를 이루자고 초대했다. 아울러 교황은 직원들을 해고시키길 원치 않는 기업인, 노동자들을 마치 자기 자녀처럼 돌보는 착한 기업인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노동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모든 이가 일자리를 얻고 우리의 일이 가치 있는 노동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성 요셉의 전구를 청했다. 다음은 교황의 강론 내용.

“’하느님께서는 (…) 창조하셨다’(창세 1,27 참조). (하느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땅을 일구며 번성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일(노동)’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의 행위를 묘사할 때 쓰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던 일을 (…)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 쉬셨다’(창세 2,2 참조). 그런 다음 하느님은 당신의 활동을 인간에게 맡기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곳을 일구고 돌봐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나와 함께 창조를 위해 일해야 한다’(창세 2,15.19-20 참조).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인간의 일은 바로 하느님 일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곧, 인간의 노동은 세상 창조가 끝날 때까지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노동은 인간이 하느님을 닮는 길입니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창조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창조 능력을 발휘하며 많은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도록 가정을 만들기도 합니다. 인간은 창조자이고, 노동으로 무언가를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소명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이 말씀을 통해 노동이 그 자체로 ‘선(善)’을 품고 있으며 사물들의 조화, 곧 아름다움과 선함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노동은 인간의 모든 측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생각과 행동 등 모든 면에서 말입니다. 곧, 인간은 노동과 얽혀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첫 번째 소명은 바로 ‘노동’입니다. 노동이 인간에게 존엄을 부여합니다. 인간을 하느님과 닮게 해주는 존엄 말입니다. 곧, 노동의 존엄입니다.”

“예전에 어느 카리타스 상담센터에 일자리를 잃은 한 사람이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청하러 찾아왔었다고 합니다. 그때 센터 직원은 (먹을 것을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적어도 이 빵을 집에 가져갈 수 있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부족합니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집에 빵을 가져갈 수 있도록 (노동으로) 돈을 벌고 싶습니다.’ 그에게는 ‘존엄’이 없었습니다. 노동으로 빵을 ‘만들 수 있는’ 존엄 말입니다. (노동의 대가로 벌어들인) 빵을 집에 가지고 갈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노동의 존엄은 지나치게 짓밟혀 왔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노예들에게 가했던 만행을 알고 있습니다.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고 오면서 했던 일 말입니다. 저는 제 모국의 땅에서 벌어진 역사를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우리는 ‘얼마나 야만적인가’라고 말합니다. (…) 그런데 오늘날에도 많은 노예들, 노동의 자유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노예입니다. 예컨대 강제 노동, (…) 그곳엔 강제 노동, 불의, 부당임금 때문에 존엄성이 짓밟힌 채 연명하고 있는 인간만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세상에 많이, 너무나 많이 벌어집니다. 정말 많지요. 몇 개월 전에 신문을 통해 아시아 어느 나라에서 벌어진 기사를 읽었습니다. 어떤 고용인이 일당 50센트도 못 받던 한 직원을 때려죽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뭔가를 잘못했다는 게 이유였죠. 오늘날 노예란 우리의 ‘파렴치한 행위(in-dignit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파렴치한 행위로 모든 사람의 존엄, 우리 모두의 존엄성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직업이 있습니다. 저는 제 존엄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형제들은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는 다시 저에게 이렇게 말하지도 모릅니다. ‘네, 신부님 말씀이 맞습니다만, 너무 먼 데서 벌어진 일이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도, 우리에게도, 바로 이곳 우리에게도 (그러한 일이) 벌어집니다. 노동자들, 일용직에 종사하는 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최저 임금을 벌기 위해 일하고 있고, 하루 8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이나 14시간을 일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일이 오늘날, 바로 ‘여기’에서 벌어집니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이곳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사회보장보험에 가입되지도 못하고 연금 혜택도 없고, 부당한 임금을 받는 가사 도우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시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있는 일입니다.”

“노동자 한 사람에게 저지르는 불의는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행위일 뿐 아니라, 불의를 저지르는 이의 존엄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스스로 자신의 수준을 격하시키고 지배와 속박의 긴장 속에서 자기 자신을 소멸시킬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 곧 ‘창조하기, 재창조하기, 노동하기’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는 정의로운 조건 하에서 인간의 존엄을 존중할 때라야 이뤄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세계 노동절을 기념하는 남자와 여자, 신자와 비신자 구분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하나가 됩시다. 일터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착한 기업인들을 비롯해 설령 그들이 우리를 잊을지라도 정의를 위해 일하는 이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두 달 전에 이탈리아에 있는 어느 기업인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도 해고시키고 싶지 않으니 저에게 기도해달라고 청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직원 가운데 한 사람을 해고하는 것은 나 자신을 해고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착한 기업인들의 이러한 양심이 노동자들을 마치 자기 자녀처럼 지켜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업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성 요셉의 전구를 청합시다. 오늘 성당에 모신 요셉 성인의 손에는 노동자의 아름다운 도구가 들려 있습니다. 우리가 노동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울 수 있게 도와 주시고, 모든 이가 일자리를 얻고 우리의 일이 가치 있는 노동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교황은 영성체 후 미사에 물리적으로 참례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해 ‘영적 영성체(신령성체)’ 기도문을 바쳤다. 다음은 교황이 바친 영적 영성체 기도문.

오, 나의 예수님,

당신의 발 아래 엎드려

당신의 거룩한 현존의 심연 안에서

하찮은 저의 마음과

통회하는 저의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 사랑의 성체 안에서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제 마음은

당신께 드리는 초라한 거처 안에서

당신을 영하고자 합니다. 

당신의 성체를 

직접 영할 수 있는 기쁨을 기다리며

영적으로나마 당신을 모시길 원하오니,

오, 나의 예수님,

제가 당신께 갈 수 있도록

저에게 오소서.

당신의 사랑이

삶과 죽음을 통해

저의 온 존재를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당신께 희망을 걸고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아멘.

미사를 마친 다음 교황이 성령께 봉헌된 산타 마르타의 집 성당에서 퇴장할 때, 미사에 참례한 이들이 모두 함께 부활 시기에 바치는 성모 찬송가인 ‘레지나 첼리(Regina caeli, 하늘의 모후님!)’를 노래했다.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태중에 모시던 아드님께서, 알렐루야.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저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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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5월 2020,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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