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코로나19에 감염된 장애인을 돕는 의료종사자들 위한 교황의 기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된 장애인들과 그들을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기억했다. 교황은 강론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성령에서 나오는 자유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인 ‘담대함’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VATICAN NEWS / 번역 박수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산타 마르타의 집 성당에서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전날인, 4월 18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미사를 봉헌했다. 교황이 미사를 시작하면서 봉독한 읽은 입당송은 기쁨을 노래한 시편 105(104)편이었다. “주님이 당신 백성을 기쁨 속에, 뽑힌 이들을 환호 속에 이끌어 내셨네”(시편 105(104),43 참조). 이날 교황의 미사 지향은 코로나19에 감염된 장애인들을 돌보는 의료진들을 위한 것이었다. 

“어제 저는 청각장애인을 위해 수화통역사로 일하시는 한 수녀님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수녀님은 제게 의료인들, 간호사들, 의사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코로나19에 감염된 장애인 환자들을 위해 일하는 분들이죠. 이분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과는 다른 기술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언제나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교황은 유다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강력하게 위협하는 사도행전의 구절을 언급하며 강론을 시작했다(사도 4,13-21). 지도자들의 위협 앞에서 두 사도는 용기와 담대함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20). 교황은 ‘담대함(franchezza)’이 중요한 말이라며, 설교자들의 행동방식이라고 강조했다. 담대함은 그리스어로 ‘파레시아(parrhesìa)’다. 이는 (불의와 억압 속에서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이끄는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뜻한다.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은 이 담대함 앞에서 닫혔으며, 또 부패했다. 교황은 성령이 이러한 완고한 마음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겁쟁이였던 베드로는 성령에게서 용기를 받아 지도자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대답한다. 교황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일관되게 모든 진실을 말한다고 설명하면서 이날 복음(마르 16,9-15)을 해설했다. 이날 복음은 예수님이 부활한 당신을 보았다고 말하는 이들을 믿지 않는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며, 온 세상에 가서 용감하게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제자들을 격려하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선교사명은 성령에서 나온다. 교황의 마지막 기도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은 항상 우리가 용기를 내도록 도와주신다. 하지만 이는 경솔함을 뜻하는 게 아니다. 용감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사려깊으며 담대하다.

미사가 끝날 무렵 교황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다음날 오전 11시 사시아의 산토 스피리토 성당에서 성찬례를 거행할 것이라고 공지했다. 다음 주 월요일 오전 7시 아침미사는 산타 마르타의 집 성당에서 재개될 것이다. 다음은 교황의 강론 내용.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 어쩌면 글도 쓸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처럼 용기 있고 담대한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사도 4,13 참조). 이 말은 우리가 사도행전에서도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설교자들의 행동방식이 되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곧, 담대함과 용기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말한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파레시아’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 역시 담대함과 용기를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어 그대로 ‘파레시아’라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담대함, 이러한 용기, 이러한 파레시아를 사도들에게서 보았지만,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담대함입니다. 사도들은 용기와 담대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는 이와 같은 말로 가득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의 신비를 ‘담대히’ 설명하려고 노력했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도 13,46 참조).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서간에는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서간의 저자는 공동체가 쇠약해지고 있으며,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고, 어떤 미지근한 것으로,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미지근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이 서간을 썼습니다. 제가 인용구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서간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히브 10,32-35 참조). ‘스스로를 되찾는 것’이란 담대함을 갖는 것이며, 앞으로 나아갈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되찾는 일입니다. 이런 담대함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담대함이 없다면 여러분은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용기가 없다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나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용기가 없다면) 여러분은 담대함이 부족하고, 그리스도인의 행동 양식이 부족하고, 자유롭게 말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 부족할 것입니다. 곧, 용기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도자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이 희생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담대함의 희생자들인 셈입니다. 그들은 궁지에 몰렸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사도 4,13-14).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본 대로 진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마음을 몹시 완고하게 닫으면서 정치적인 길, 타협의 길을 찾았습니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들에게 위협을 줘봅시다. 저들에게 처벌할 것이라고 말하고 입을 다물지 한 번 봅시다’(사도 4,16-17 참조). 사실 그들은 담대함 때문에 궁지에 몰렸고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가?’라고 말할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미 닫혀 버렸고, 완고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부패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경험하는) 비극 중 하나입니다. (사도들의 이러한) 설교의 담대함과 무모함에서 드러나는 성령의 힘은 부패한 마음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부패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이 부패를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

“유다 지도자들은 궁지에 몰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결국엔 타협점을 찾아냅니다. ‘사도들을 조금 위협해보자, 조금 놀라게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아무 때나 말하지 말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렇게 합시다. 당신들은 평화롭게 가시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마시오’(사도 4,18 참조). 그런데 베드로는 우리가 알고 있듯 태어나면서부터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겁쟁이였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20). 주님을 부인했던 이 겁쟁이에게 이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요? 베드로의 마음에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요? 그것은 성령의 선물이었습니다. 곧, 담대함, 용기, 파레시아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베푸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성령을 받은 직후 그들은 설교하러 나갔습니다. 조금 용감하긴 하지만, 그들에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었습니다. 곧, ‘일관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징, 그러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징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담대하게 모든 진실을 말합니다. 일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러한 일관성을 요구하십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주간 첫날 일어난 부활 사건을 요약해서 들려준 다음, 예수님이 ‘그들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마르 16,14)고 전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성령을 받아라’고 인사하신 다음, 성령의 힘으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용감하게 나가거라. 담대하게 나가거라. 두려워 하지 마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의 대목을 다시 살펴봅시다. ‘여러분의 그 확신(담대함)을 버리지 마십시오. 성령이 주신 은총을 버리지 마십시오’(히브 10,35 참조).  선교사명은 바로 여기에서, 말씀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우리를 담대하게 하고 솔직하게 만드는 이 은총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항상 용감해지도록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길 빕니다. 이는 경솔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경솔함이 아닙니다. 용감해지는 것입니다. 용감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사려깊습니다. 담대할 뿐입니다.”

교황은 영성체 후 미사에 물리적으로 참례하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영적 영성체(신령성체)를 하라고 초대했다. 이어 영적 영성체 기도문을 바친 뒤에는, 성체조배와 성체 강복으로 미사를 마무리했다. 

다음은 교황이 바친 영적 영성체 (신령성체) 기도문.

오, 나의 예수님, 

당신의 발아래 엎드려

당신의 거룩한 현존의 심연 안에서 

하찮은 저의 마음과

통회하는 저의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 사랑의 성체 안에서 

당신을 흠숭 하나이다. 

제 마음은 

당신께 드리는 초라한 거처 안에서 

당신을 영하고자 합니다. 

당신의 성체를 

직접 영할 수 있는 기쁨을 기다리며

영적으로나마 당신을 모시길 원하오니, 

오, 나의 예수님,

제가 당신께 갈 수 있도록 

저에게 오소서. 

당신의 사랑이 

삶과 죽음을 통해 

저의 온 존재를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당신께 희망을 걸고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아멘. 

미사를 마친 다음 교황이 성령께 봉헌된 산타 마르타의 집 성당에서 퇴장할 때, 미사에 참례한 이들이 모두 함께 부활 시기에 노래하는 성모 찬송가인 ‘레지나 첼리(Regina caeli, 하늘의 모후님!)’를 노래했다.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태중에 모시던 아드님께서, 알렐루야.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저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알렐루야.

동정 마리아님, 기뻐하시며 즐거워하소서.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18 4월 2020, 20:40
모두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