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세레티 신부 “십자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 위한 일치의 표징”
Don Massimo Serretti / 번역 이창욱
명백히 불공평하고 불균형을 이루는 두 현실의 이미지가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한 민족에 대한 군사적 공격이라는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 아래 함께 있는 두 민족, 두 구성원의 현실이다. 둘 다 피와 죽음이 있다. 하나는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피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흘리는 구세주의 성혈이다.
두 민족, 두 구성원이 제13처를 향해 걸어가는 그 십자가 위에는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요한 19,20) 쓰여 있는 명패(titulus crucis)가 달려있다. 세 언어의 실체와 다원성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에 연루돼 있는 민족들의 다원성을 나타낸다.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이사 66,18) 그리고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지리라”(이사 11,10 참조). 고대 찬미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두고 “십자나무에서 다스리신다”고 확언하고 있으며 십자가상의 명패도 그분을 ‘임금’으로 정의한다. “주님께 왕권이 있고 민족들의 지배자시기 때문이다”(시편 22[21],29).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임금들의 임금”(묵시 17,14)이신 어린양이시고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이라는 이름이 적혀”(묵시 19,16) 있다. 또한 이렇게도 선포한다. “세상 끝이 모두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고 민족들의 모든 가문이 그분 앞에 경배하리니”(시편 22[21],28).
전쟁의 핍박으로 흐르는 피는 분열을 부추기는 반면, 어린양이 바치신 고귀한 피는 하나 되게 하고 평화를 이룬다. 이 드라마에는 유럽 민족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평화란 톨스토이 식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변증법이 아니다. 실제로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평화는 신의 이름이자 속성이며, 따라서 합법적으로 인간 행동과 동등한 변증법적 유대에 둘 수 없다. 이제 유럽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모든 유럽 국가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민족에서 태어났으며 세례성사에서 일치를 찾았다. 세례성사야말로 민족 단위와 정체성을 형성한 요인이었다. 유럽 역사의 특정 시점까지는 유럽 국가들의 그리스도교 기원을 통해 서로 다른 정체성을 뛰어넘은 현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곧, 교회는 초국가적 일치의 자리이며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명령과 신적 계획에 따라 모든 민족으로 구성됐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 28,19 참조).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다른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민족,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문화가 하나인 교회에 모인 것이 교회의 유일무이함, 교회의 진리, 교회의 초월적 기원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지표라는 것을 매우 놀라운 방식으로 인식했다.
동서 교회 대분열과 16세기의 유럽 그리스도교의 분열은 상관관계가 있는 “유럽 의식의 위기” 그 자체를 촉발했다. 여기서 존 헨리 뉴먼이 무척이나 반대했던 이데올로기가 탄생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종교가 분열의 요인임을 입증함으로써 정치 권력에 보다 광범위한 일치(통합)의 관점을 부여했다(『수장령』(Atto di supremazia) 참조). 오늘날까지 유럽은 진정한 일치의 지점, 일치가 가능한 유일한 지점을 재발견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길 원하지도 않는다. 유럽이 바로 그 지점에서 탄생했음에도 말이다.
이 거시적 시나리오에서 우리가 출발했던 역사적 사실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전쟁 중인 두 민족(침략 당한 민족과 침략한 민족)의 두 구성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는 패권 다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분열되지 않은 일치의 길과 일치의 비결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은 여전히 십자가 아래에서다.
복음서가 말하듯이 예수님께서는 바로 십자가 위에서 시편 22[21]편으로 기도하신다. 해당 시편은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에 대한 주님의 통치를 예언하는 것(시편 22[21],28-29 참조)에 더해 “새로운 백성”(32절 참조)의 탄생을 선포한다. 밀알 하나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그리고 이 “태어날 백성” 안에서 역사, 문화, 언어가 다른 민족들은 우수한 일치의 지점을 발견하고,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특수성도 검증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기도하신 시편에 나오는 “태어날 백성”의 유전적(genetico) 특징 때문이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하느님 백성을 가리켜 “특별한 백성(popolo sui generis)”이라고 말했다. ‘sui generis’는 글자 그대로 자신의 기원(genesi)과 관련하여 정의되고 구별된다는 뜻이다. 곧, 자신을 탄생시킨 것, 더 나은 표현을 쓰자면, 자신을 탄생시키신 분과 연관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창조될) 새로운 백성”(시편 102[101],19 참조)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히브 9,14) 어린양이 피를 흘리며 아버지께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태어난다. 아버지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을 통해 거룩한 영에 따라”(로마 1,4 참조) 백성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은 세례소인 교회(성 대 레오 교황)의 동정 태중에서 성자의 세대에 속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이 탄생의 기원이 거룩하기에, 여기서 태어나는 이들을 결속시키는 유대도 거룩하고, 이 온전한 유대의 특질도 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본성은 신적(sacramentum, 사크라멘툼, ‘거룩한 것’, ‘성스러운 것’)이며 하늘에 유보돼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그리고 오직 여기에서만 유럽 민족들의 깨어진 일치가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다. 바로 여기서 그리고 오직 여기에서만 폭력과 죽음의 전조가 아닌 인류 가족의 일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교황 회칙 「Fratelli tutti」 참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동안 성자와 성부 사이에서 그리고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이뤄진 행위는 온전히 신적인 것이었고, 그분께서 돌아가신 후 십자가에서 시신을 내리는 동안 다시 움직이도록 부름받은 쪽은 인간이었다. 그분의 첫 번째 행위도 당신의 육적 몸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것이 길이다. 그분께서 길이시고, 그분의 일치가 길이다. “여러분이 인간을 거치면 하느님께 도달할 것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성인).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제13처)은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들이는 환대다. 이제 우리는 영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이신 성체를 받아 모신다. 교회이신 그리스도의 지체와 친교를 나누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에 참여하는 성체성사적 친교를 통해서 말이다. 그리스도교 종파들 사이에서 이 두 가지 환대의 방식은 아직 온전한 일치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유럽의 문제다. 진정한 유럽의 진정한 일치를 위한 유럽의 문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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