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크 주교와 프란치스코 교황 그레크 주교와 프란치스코 교황 

그레크 주교 “시노드는 언제나 교회 사명의 기로가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재위 기간에서 ‘공동합의성(synodality)’이 갖는 가치와 아마존 시노드 여정에 대해 시노드 사무처 사무총장 보좌 그레크 주교와 일문일답을 나눴다.

Alessandro Gisotti / 번역 양서희

지난 10월 1일 교황이 마리오 그레크(Mario Grech) 주교를 시노드 사무처 사무총장 보좌(Pro-Secretary General)로 임명한 의도는 “명백하게 공동합의적”이다. 임명 직후, 시노드 사무총장의 지도력에 힘을 보태고 있는 그레크 주교는 ‘범아마존 지역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특별 회의(이하 아마존 시노드)’ 기간 동안 로렌초 발디세리(Lorenzo Baldisseri) 추기경의 “옆에서 나란히 함께 걸어” 가도록 부름 받았다. 몰타섬 출신의 이 고위 성직자는 아마존 시노드 기간 동안 체험한 것들을 비롯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 방향 안에서 공동합의적 차원의 중요성에 대해  「로세르베토레 로마노」와 「바티칸 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설명했다. 이 인터뷰는 임명 후 처음으로 이뤄졌다.

며칠 전, 아마존 시노드가 폐회했습니다. 이 특별한 시간을 경험하신 소감은 무엇입니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거듭 말씀해오신 어떤 부분들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현실은 중앙에서 바라볼 때보다, 주변부에서 바라볼 때 훨씬 명백하게 보인다는 것이죠! 이 사실은 사회적 현실이나 문화적 현실뿐만 아니라 교회의 체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라질 출신의 한 주교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분께서는 형제 주교님들의 말을 경청하시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지역 출신이면서도 다른 이들의 경험과 필요에 대해 무지했다는 사실을 깨달으신 것이죠. 이렇게 같은 지역에서 온 사람들에게도 공동합의적 체험이 선사하는 가치가 큰 데, 모든 것의 중앙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 체험이 얼마나 값지겠습니까! 시노드 기간 동안 수면 위로 떠오른 많은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사람들 안에 심어진 수많은 ‘세미나 베르비(semina verbi, 말씀의 씨앗)’를 비롯해, 그들의 문화 안에서 드러나는 ‘베스티지아 에끌레시애(vestigia ecclesiae, 교회의 흔적)’를 바라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중앙부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주변부의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길 때 얼마나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아마존 시노드가 시작된 직후, 시노드 사무처 사무총장 보좌로 임명되셨습니다. 교황님의 임명에 순명하실 때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저는 아주 작은 교구 출신입니다. 하지만 굉장히 강한 선교 사명을 지닌 곳이지요. 신학교에서 양성을 받던 시기에 ‘세상이 곧 나의 본당’이라는 말을 듣곤 했어요.  하지만 제가 알아차리기 전부터 주님께서는 제가 새로운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직무는 선교 사명 이상의 어떤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티칸은 선교지는 아니지만, 교황님께서 저를 임명하신 이 자리를 선교적 부르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시노드 사무처라는 곳은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모임이 열리는 교차로이면서 동시에 같은 시노드 주교단이 복음화의 도구가 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 「주교들의 친교」에서 말씀하신 것처럼요. ‘’새로운 복음화 단계’로 들어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 시기에, 교회는 ‘온 세상에서 지속적인 선교 자세’를 유지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이에 따라 주교대의원회의도 모든 다른 교회 제도와 마찬가지로 ‘자기 보전보다는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가 되도록 부름받고 있다’”(「주교들의 친교」(Episcopalis Communio), 1항).

“시노드”는 현 교황님의 사목에 있어 핵심 단어 중 하나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있어 공동합의적 차원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공동합의성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생각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개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황님께서는 당신 여정의 ‘보따리’ 안에 하느님 백성의 신학을 담고 계신 것이 명확하지요. 이는 교황님께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주교로 지내실 때의 경험들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교황님의 충분한 이해의 결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목 경험에 있어 (하느님의) 백성은 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분의 신학과 교회론도 하느님 백성 가운데서 경험하신 것들의 결실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교회는 교계제도가 아닌 하느님 백성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 곧 주교, 축성생활자, 평신도 모두가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 동일한 세례성사를 통해 동일한 품위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교황님께서는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2항을 즐겨 인용하십니다. 이 부분은 하느님의 백성은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하느님 백성의) 믿음에서 오류가 없게 합니다. 비록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여도 (…) 하느님께서는 신자들 전체에게 신앙의 본능, 곧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심어주시어 무엇이 참으로 하느님의 것인지를 식별하도록 해주십니다. 성령의 현존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적인 실재들과 어떤 공본성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확히 표현할 방법이 없더라도 그러한 실재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지혜도 주십니다’(「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19항). 사실 신앙 감각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공동합의성의 신학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열쇠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계시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8항;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2항)에 영향을 끼친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님의 신앙 감각에 대한 성찰은, 성인이 교의적 문제에 대한 신자들과의 면담을 기반으로 쓴 글에서 나타납니다. 아마존 시도느 기간 중에 이뤄진 그의 시성식은 (제 생각에는) 그 동안 등한시되어온 신앙 감각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교황님께서 시노드 폐막 미사 강론 때 ‘그 신앙 감각이 바리사이의 말에는 누락되어 있었다’라며, 신앙 감각을 언급하신 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시각에서는 “두 개의 아마존 시노드”가 있었다고들 말합니다. 한 가지는 시노드 교부들간의 형제애적 분위기가 가득한 시노드 회의장 안에서 이뤄진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전자와 정반대의 분위기였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뤄진 것입니다.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몇몇 흥미로운 책에 쓰여 있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잘 알려진 사안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세요. 전임교황인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2013년 2월 14일, 로마교구 사제들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의회 교부들이 있었습니다. 진짜 공의회를 말하는 것이지요. 반면, ‘미디어’를 통한 공의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의 공의회의 한 부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 ‘미디어’를 통해 공의회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공의회 교부들이 신앙 안에서 행동하는 동안, 공의회는 (…) 그 시대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징표에 대한 이해를 찾는 과정인데요. (…) ‘기자들의 공의회’는 본질적으로 신앙 안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미디어’의 기준에 따라, 신앙과 상관없는 전혀 다른 해석학적 관점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사실 한편으로 이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서로의 맥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지요. 또 한편으로는 교회는 그의 관점을 보다 정확하게 명시하여 소통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기자들은 교회의 사건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번 시노드 여정 안에서 제기된 요청 중에는 교회 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의결도 있었습니다. 교회 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의견을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시노드의 여정 안에서 교회 내 여성의 역할에 대해 다양하고 흥미로운 토론이 있었습니다. 시노드 최종 보고서에도 담겨 있지요. ‘아마존 지역의 교회는 교회 내 여성을 위한 보다 넓고 중요한 기회를 만들고 싶어합니다. 만약 교회가 여성들의 완전하고 실제적인 측면을 잃는다면, 불임에 노출될 것입니다’(「최종 보고서」, 99항). 교회 내 여성의 기여 강화에 대한 요청은 시노드 회의장에 참석한 (수도자와 평신도) 여성에게서만 흘러나온 소리가 아니라 주교님들의 입에서도 나왔습니다. 그 주교님들은 자신의 교구 안에서 이미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의 기대에 맞춰 목소리를 낸 것이었습니다. 아마존 지역의 교회는 사실상 많은 지역에서 여성의 역할을 통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많은 여성들, 특히 여성 수도자들은 아무런 무리 없이 사제가 부족한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공동체의 지도자가 여성일 때 적합한 직무의 창조로 복음화와 사목 직무에 요청되는 분야 안에서 여성들에 의해 이미 이뤄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조명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사권을 제외한 결정 권한에 있어서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제안이 제기되었습니다. 시노드 전에 이뤄진 회의에서 여성들의 종신 부제직 허용에 대한 요청도 많이 제기되었습니다(「의안집」, 103항 참조). 이 모든 제안은 교회가 복음화의 별이신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닮은 위대한 여성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여성의 역할을 기능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아선 안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교회 내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꽤 자주 공리주의의 영향을 느낍니다. 어떤 긴급한 상황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도록 여성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자는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는 게 더 올바르고 복음화적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시각은 시노드 폐막 연설에서 하신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교회 내 여성의 역할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내 여성의 역할에 대해 생각할 때, 기능적인 부분들에만 치중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사명은 기능 이상의 것입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바라셨던 시노드 위원회가 하느님 백성에 귀 기울이고 교도권에 자극을 주기 위한 장으로 점차 발전되어가고 있습니다. 「주교들의 친교」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더 깊이 발전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 교황령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주교들과 하느님 백성 사이의 대화를 강화하기 위한 몇 가지 기준들을 제안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 안에서 하느님 백성의 참여를 늘리려던 것이었죠. 이 과정은 신자들의 친교, 주교들의 친교, 그리고 교회의 친교 안에서 더 강화됩니다. 사실 교황님께서 강조하고 계신 것은 ‘주교대의원회의가 주교들 서로 간에 그리고 주교들과 로마 주교 사이에 대화와 협력을 한층 더 촉진하는 방향으로 더욱 발전’해야 한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과, 이것이 하느님 백성과 절대로 분리해서 생각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주교에게 교회 생활과 교회 안의 생활은 그의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 주교대의원회의도 언제나 더욱 하느님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특권적인 도구가 되어야 한다. (…) 자기 신자들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주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묵시 2,7)과 ‘양 떼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이를 위해 주교에게 조언하는 임무를 지닌 교구 단체들을 통해서도 충실하고 건설적인 대화를 증진한다’(「주교들의 친교」, 5, 6항 참조). 이러한 지평에서 바라본다면 시노드의 역동성은 더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과 로마 주교와 합의체적이고 교계적인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의 성사적인 단체성”(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64항. 72항도 참조). 세계주교대의원회 제정 50주년 기념 연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강조하시듯 공동합의성이란 “우리가 교계적 직무 자체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해석의 틀을 제시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향한 역사의 길을 따라 하느님의 양떼와 ‘함께 걸어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에, ‘교회와 시노드는 동의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교회 안에서 그 누구도 다른 이보다 더 높게 ‘들어올려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 안의 모든 이는 그들 삶의 여정에서 우리 형제자매들을 섬길 수 있도록 스스로를 ‘낮추어’야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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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11월 2019, 1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