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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이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4월 10일 ‘천사의 월요일’(Lunedì dell'angelo)인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부활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전할 때마다 그분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고 강조했다. 두려움과 슬픔에도 낙심하지 않고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빈 무덤을 발견한 여성 제자들이 사도들에게 모든 것을 전하기 위해 달려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선포할 때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 교황은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방법과 관련해 우리 자신만을 위해 그분을 붙잡는 것도, 판단과 비난이 두려워 그분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며, 선전선동이나 개종강요가 아닌 선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복음은 부활절 아침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여인들의 만남을 되새기게 합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보고 만난 이들이 바로 여성 제자들이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왜 하필 그 사람들일까요? 아주 간단한 이유는 그들이 가장 먼저 무덤에 갔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예수님의 이야기가 끝난 것 같아 고통스러웠지만,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슬픔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집에 머물지 않고 이른 아침 해가 뜨자마자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 드릴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무덤이 돌로 막혀 있었으므로 그들은 누가 그 무거운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 수 있을지 서로 말했습니다(마르 16,1-3 참조). 하지만 사랑의 몸짓을 이루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는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합니다. 그들은 낙담하지 않고 두려움과 슬픔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하는 길, 곧 우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복음에 묘사된 장면을 살펴봅시다. 여인들이 도착하여 빈 무덤을 보고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마태 28,8 참조)고 말합니다. 그들이 주님 부활이라는 소식을 전하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러 오십니다. 이 점에 각별히 주목합시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전하러 갈 때 그들을 만나러 오십니다. 예수님을 선포하러 가는 그들을 예수님께서 만나신다는 것, 이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할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방법이 그분을 우리 곁에 붙잡아 두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우리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그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 행여 사람들의 판단과 비판을 받게 되거나 특정 질문이나 도발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 발생한다면 차라리 애초부터 그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안 됩니다. 이런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선포할 때 우리에게 오십니다. 여러분은 선포의 여정에서 항상 주님을 발견합니다. 주님을 선포하면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찾으면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항상 길을 떠나고 있어야 합니다. 여인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우리가 예수님을 증언함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함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우리 마음에 새겨 봅시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기의 탄생과 같은 놀라운 소식을 듣곤 합니다. 그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는 이 기쁜 소식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저기, 제가 아들을 낳았어요. 정말 예쁘답니다!” 이 소식을 전하면서 우리도 이 사실을 반복하며 어떻게든 우리 안에서 더 생생하게 되살립니다. 이런 일이 매일 혹은 어떤 중요한 날에 좋은 소식과 관련해 일어나는 일이라면, 좋은 소식임은 물론 인생의 가장 좋은 소식이자 생명 그 자체이시며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신 예수님과 관련해서는 더 좋은 일이 끝없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그분을 선포할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선포한다는 것은 단순히 선전선동이나 개종을 강요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니고 말고요. 선포는 선전선동이나 개종강요와 별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포를 합니다. 다른 목적을 품은 사람은 개종을 강요하는데, 이는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포할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인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선포할 때마다 우리 안에 더 많이 머무십니다.

복음의 여인들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무덤을 막은 돌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무덤으로 갔습니다. 도시 전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지켜봤음에도 그들은 주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 도시로 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장애물도 우리가 그분을 선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기쁨을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고이 간직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그분을 참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 여인들의 체험 앞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각자 대답해 봅시다.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증거한 것이 언제였나? 내가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증거한 것은 언제였나?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주님을 선포하는 기쁨을 느끼도록 하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서 평온하고, 행복하고, 착한 것인가?’ 우리 각자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복음의 기쁜 선포자가 될 수 있게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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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4월 2023, 23:49

부활 삼종기도란 무엇인가?

부활 삼종기도(라틴어 Regina Coeli, 혹은 Regina Caeli 레지나 첼리)는 4개의 성모 찬송가 중 하나다. 나머지 3개의 성모 찬송가는 ‘구세주의 거룩하신 어머니(라틴어 Alma Redemptoris Mater 알마 레뎀토리스 마테르)’,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라틴어 Ave Regina Coelorum 아베 레지나 첼로룸)’, ‘모후이시며(라틴어 Salve Regina 살베 레지나)’다. 

부활 삼종기도는 지난 1742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삼종기도(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 대신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의 부활 시기 동안 죽음에 승리한 표징으로 일어서서 바치게 했다. 

부활 삼종기도 역시 삼종기도처럼 하루에 세 번 바쳤다. 아침, 정오, 저녁 시간에 하루의 시간을 하느님과 성모님께 봉헌하기 위해서 바쳤다. 

독실한 전통에 따르면, 이 오래된 찬송가는 6세기 혹은 10세기에 생겨났다. 그러다 18세기 중반 프란치스코회 성무일도서에 삽입되면서 일반적인 신심으로 널리 알려져 자리잡았다. 4개의 짧은 계응시구로 이뤄져 있으며, 각자 알렐루야로 마무리된다. 이 기도는 신자들이 마리아와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기 위해 하늘의 모후이신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5년 부활절 다음날인 4월 6일에 부활 삼종기도를 바치면서 이 기도를 바칠 때 가져야 할 마음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 (…) 마리아께 기뻐하라고 초대하면서 그분께 기도합시다. 왜냐하면 자신의 태중에 모시던 분께서 약속한 대로 살아 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성모님의 전구에 맡겨드립시다. 사실, 우리의 기쁨은 마리아의 기쁨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예수님의 사건들을 지키셨고, 또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어머니가 기쁘시기 때문에 기뻐하는 자녀들의 벅찬 감정으로 바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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