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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제의 무덤에서 돌을 치우고 삶으로 돌아가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이 3월 26일 사순 제5주일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에 관한 이날 복음을 해설하며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초대했다. 아울러 질병, 낙심, 배신, 실패조차도 빛으로 가는 길을 막지 못한다며,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과 함께라면 고통과 비관주의에 갇히지 않고 문턱 너머를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사순 제5주일인 오늘 복음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요한 11,1-44 참조). 부활절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중 마지막, 곧 당신의 친구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라자로의 절친한 친구이신 예수님께서는 그가 곧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아시고 길을 나서시지만 장례를 치른 지 나흘이 지나 모든 희망이 사라진 후에야 그의 집에 도착하십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도착하시자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의 마음에 작은 신뢰가 싹틉니다(22절. 27절 참조).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이 빛, 이 작은 희망에 매달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을 갖도록 초대하시고 무덤을 열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런 다음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라자로에게 “이리 나와라!”(43절) 하고 외치십니다. 그러자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서 나옵니다. 이게 바로 기적입니다. 단순하죠.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절망감을 느끼거나 –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 희망하길 포기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나쁜 경험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마음은 희망을 품을 수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상실, 질병, 쓰라린 실망, 잘못이나 처절하게 겪은 배신, 중대한 잘못 등으로 인해 그들은 희망을 포기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라고 말하며 모든 희망의 문을 닫아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인생이 닫힌 무덤처럼 보이는 순간, 모든 것이 어둡고 주변에 슬픔과 절망만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기적사화는 그렇지 않다고, 이것이 끝이 아니며, 이 순간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순간에 그분께서 ‘우리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려고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까이 오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우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라자로를 위해 우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우십니다. 복음은 그분께서 마음이 북받치셨다는 것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33절. 38절 참조) 눈물을 흘리셨다(35절)는 점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을 멈추지 말라고, 눈물을 흘리지 못하게 감정을 억누르지 말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무덤에 다가오시어 그때처럼 우리에게 “돌을 치워라”(39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순간에는 마치 우리 내면에 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돌을 없애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돌을 치워라”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돌을 치워라.’ 고통, 잘못 심지어 실패조차도 어둡고 외롭고 닫힌 방 안에 숨겨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돌을 치워라.’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밖으로 꺼내라는 말씀입니다. “아, 그러기엔 너무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화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 돌을 나에게 던져라. 나는 너와 함께 있고, 너를 사랑하고, 네가 다시 살아나길 바라니,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을 나에게 던져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라자로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이렇게 되풀이하십니다. ‘이리 나와라!’ 다시 일어나 다시 여정에 나서고 믿음을 되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에서 우리는 더 이상 다시 일어날 힘이 없는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 앞으로 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첫 걸음을 배울 때처럼 ‘내가 손을 잡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사랑하는 자매 여러분, 여러분을 꽁꽁 싸매고 있는 천을 벗으십시오(44절 참조). 부디 여러분을 우울하게 만드는 비관주의에 굴복하지 말고, 여러분을 고립시키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나쁜 경험의 기억으로 인한 낙담에 굴복하지 말고, 여러분을 무력하게 만드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자유롭고 살아 있길 바란다.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고 너희와 함께 있겠다! 모든 것이 어둡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고통에 갇히지 말고 희망을 죽지 않게 하여라. 형제여, 자매여, 살아나라!”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손을 잡아라.” 그분께서 우리 손을 잡아 주십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을 끌어내시게 하십시오.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나쁜 순간을 경험하고 있는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 구절은 읽으면 큰 도움이 되는 생명에 대한 찬가입니다. 부활절이 가까워질 때 이 내용을 봉독합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도 우리를 짓누르는 듯한 어떤 무게나 고통, 어떤 나쁜 일, 밖으로 꺼낼 수 없는 해묵은 죄, 젊은 시절에 저지른 잘못 등을 마음속에 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미처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나쁜 것들은 반드시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리 나와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돌을 치우고 가까이 계신 예수님을 만나러 나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마음을 열고 우리의 걱정을 그분께 맡길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의 무덤을 열고 문턱을 넘어 그분의 빛을 바라볼 수 있는가, 아니면 그러길 두려워하는가?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작은 거울처럼 생명의 말과 몸짓으로 우리가 사는 환경을 비출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희망과 기쁨을 증거하고 있는가? 죄인인 우리 모두, 그렇게 하는가? 그리고 고해사제들에게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고해성사는 고해자를 고문하는 자리가 아니라 용서하는 자리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모든 것’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것’을 용서하기 위해 고해소에 앉아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희망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는 기쁨과 우리를 둘러싼 어둠에 빛을 비추라는 소명을 우리 안에 새롭게 해 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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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3월 2023, 19:31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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