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형식적인 계명 준수는 무의미합니다. 사랑이 계명을 완성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월 12일 연중 제6주일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종교적 규범은 비록 필요하고 훌륭하지만 “계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문자를 넘어서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살인이나 도둑질,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의인으로 자처한다면 그저 계명의 의미에서 동떨어진 “외적 신심”에 불과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교황은 “최소한 꼭 해야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형식적인 준수에 그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사랑하라고 당부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전례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완성한다’는 이 말은 예수님과 그분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핵심어입니다. 하지만 이 “완성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께서는 완성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면서 이를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 성경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 말로 형제자매가 상처를 입는다면 물리적으로 살인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성경은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이중성과 거짓으로 훼손된 사랑을 나눈다면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성경은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위선적으로 행동한다면 엄숙한 맹세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마태 5,21-37 참조). 이런 것들은 완성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봉헌 예식”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침으로써 거저 받은 하느님의 선물에 보답했습니다. 매우 중요한 예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으로부터 조건 없이 받은 선물에 상징적으로 보답하기 위해 예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중대한 이유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예식을 중단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떤 형제가 우리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일이 생각나면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러 가기 위해 예물을 바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23-24절 참조). 그래야만 예식이 ‘완성’됩니다.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받을 자격조차 없는 우리를 향해 첫 발을 내딛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과 화해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지 않고는 그분의 사랑을 기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계명의 완성은 이와 같아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외적인 계명 준수, 단순히 예식을 준수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겉치레가 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비록 종교적 규범이 필요하고 또 훌륭하지만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계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문자를 넘어 그 의미를 살아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형식적인 계명 준수라는 숨막히는 금고에 가둬서는 안 됩니다. 문자를 넘어 그 의미를 살아내지 않으면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상전이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진정한 의미에서 동떨어진 외적 신심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전이신 하느님을 섬긴다는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자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 문제는 예수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때때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곤 합니다. “신부님, 저는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도둑질을 하거나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습니다. (...)” 마치 “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최소한 꼭 해야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형식적인 준수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행하라고 초대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계산이나 도표로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최소가 아니라 최대로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너희를 특정 수준까지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절대 특정 수준까지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랑은 항상 특정 기준 너머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 기준을 넘어서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당신 생명을 내어주시고 당신을 죽인 자들을 용서하심으로써 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루카 23,34 참조). 그리고 당신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계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요한 15,12 참조). 이것이 율법, 믿음, 참생명을 완성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곧, 나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나에게 신앙생활의 관건은 무엇을 따지고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과의 사랑 이야기인가? 나는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체면”만 잘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가, 아니면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려고 노력하는가? 그리고 때때로 나는 예수님의 위대한 계명을 스스로 점검하는가?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내 이웃을 사랑하는지 스스로 살펴보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있어 융통성이 없거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자비로운 이가 돼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지키신 마리아께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빕니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12 2월 2023, 23:07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최근의 삼종기도와 부활 삼종기도

모두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