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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정의는 처벌이나 형벌이 아니라 구원하는 자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월 8일 주님 세례 축일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서로의 짐을 짊어지자”며 “서로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서로 도와주자”고 초대했다. “편가르기”를 하지 말고 “함께 나누기”를 실천하자고 초대한 교황은 그리스도인이 이 같은 방식으로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죄인을 단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를 구원하는 것, 다시 태어나게 하여 의로움을 이루는 것, 곧 불의한 사람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교황은 또 “험담은 치명적인 무기”라고 지적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지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놀라운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나지 않게 나자렛에서 지내신 이후 공생활의 첫 시작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분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요르단 강가로 가십니다(마태 3,13-17 참조). 세례는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회심하는 예식이었습니다. 이날 전례에 대한 한 찬미가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려고 “헐벗은 영혼과 맨발”로 갔다고 노래합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헐벗은 채 열린 영혼으로 말입니다. 이를테면 투명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러 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는 장면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선택을 하셨을까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죄 없으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분께서 왜 그런 선택을 하셨을까요? 우리는 요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15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의로움, 그분께서 세상에 이루려 하신 그 의로움을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대개 정의를 편협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잘못한 사람이 대가를 치르고 그런 식으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보상하는 걸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정의는 훨씬 더 큽니다. 죄인을 단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를 구원하는 것, 다시 태어나게 하여 의로움을 이루는 것, 곧 불의한 사람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에서, 하느님의 마음인 연민과 자비 깊은 곳에서 나오는 의로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악에 짓눌리고 죄와 나약함의 무게로 넘어질 때마다 마음이 움직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정의는 처벌이나 형벌을 내리기 위한 게 아니라, 사도 바오로가 단언하듯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를 의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로마 3,22-31 참조). 악의 올가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우리를 치유하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할 때마다 우리를 벌하시려고 기다리시는 게 아니라 손을 내밀어 우리가 일어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가에서 당신 사명의 의미를 우리에게 드러내신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곧, 그분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어 심연의 물, 죽음의 물로 내려가시려고 오셨습니다. 죽음의 물에 빠진 우리를 구하시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의 참된 정의는 구원하는 자비임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분으로 생각하길 꺼려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의로움은 바로 구원하는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의로움, 그분의 정의는 우리 인간조건을 함께 나누고 우리 고통과 연대하며 우리 어둠 속으로 내려가 우리에게 빛을 되찾아 주시려고 우리 가까이로 오시는 사랑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친히 죽음의 심연 밑바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 심지어 더 이상 하늘나라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여 미끄러져 내려간 이들까지도 하느님의 손을 발견하고 그분의 손에 매달려 어둠에서 일어나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지으신 빛을 다시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2008년 1월 13일 강론).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그러한 자비로운 정의를 생각하길 꺼려합니다. 앞으로 나아갑시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십니다. 그분의 정의는 자비롭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손을 잡으시도록 합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이런 식으로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을 선인과 악인으로 ‘가르며(dividendo)’ 판단하고 단죄하는 엄격함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상처와 약함을 ‘함께 나누며(condividendo)’ 그들을 받아들여 그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자비로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편가르기가 아니라 함께 나누기’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갈라치기가 아니라 함께 나누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함께 나누도록 합시다. 험담하고 파괴하는 대신 서로의 짐을 짊어집시다. 서로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서로 도와줍시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봅시다. ‘나는 편가르기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함께 나누는 사람인가?’ 잠시 생각해 봅시다. ‘나는 예수님 사랑의 제자인가, 아니면 분열을 일으키는 험담의 제자인가?’ 험담은 치명적인 무기입니다. 험담은 사랑을 죽이고, 사회를 죽이고, 형제애를 죽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인가, 함께 나누는 사람인가?’

이제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께 기도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성모님을 통해 우리의 약함 안에 잠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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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1월 2023, 08:37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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