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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시기는 위선의 가면을 벗는 은총의 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베드로 광장에서 12월 4일 대림 제2주일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세례자 요한의 “비밀”을 풀이했다. 세례자 요한은 언뜻 보기에 혹독하고 가혹해 보이지만 사실 “이중성”과 “위선”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교황은 이중성과 위선이 우리에게도 위험이 된다고 경고하고 대림시기에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회심의 물에 몸을 담그자고 초대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좋은 주일입니다!

대림 제2주일인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경 본문은 그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마태 3,4). 성경은 그가 모든 이에게 회심하라고 초대했다고 전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2절). 또한 그는 하늘 나라가 임박했다고 설교했습니다. 요컨대 그는 일견 엄격하고 급진적인 사람으로, 언뜻 보면 가혹하게 보일 수도 있고 어떤 두려움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우리는 왜 교회가 매년 이 대림시기 동안 우리의 주요 여정의 동반자로 그를 제시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의 엄격함 이면에, 겉보기에 가혹해 보이는 그 이면에 숨겨진 것은 무엇인가? 요한에 관한 비밀은 무엇인가? 교회가 요한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사실 세례자 요한은 가혹한 사람이라기보다 ‘이중성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위선으로 유명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이 그에게 다가왔을 때 그의 “알레르기 반응”은 매우 강했습니다! 사실 그들 중 몇몇은 세례자 요한이 꽤 유명해졌기 때문에 호기심이나 혹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그에게 갔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철석같이 믿는 그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은 세례자 요한의 통렬한 호소에 직면하여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9절)며 스스로를 정당화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중성과 교만 때문에 은총의 기회, 곧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는 오만에 사로잡혀 마음의 문을 닫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8절) 하고 말했습니다. 이는 사랑의 외침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모습을 보고 “네 인생을 망치지 말아라!” 하고 부르짖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위선은 실로 가장 심각한 위험입니다. 위선은 가장 거룩한 현실까지도 망쳐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선은 심각한 위험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위선자들을 가혹하게 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 23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대 위선자들에게 아주 혹독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왜 이렇게 하는 걸까요? 그들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서입니다. 반면에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겼던 이들은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5절)고 성경은 전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모시려면 자신을 뽐내는 만용이 아니라 겸손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모시기 위한 방법은 겸손이지 만용이 아닙니다. “우리는 강인한 민족, 위대한 민족입니다. (...)” 이렇게 자신을 뽐내는 게 아니라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추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우리 각자 자신의 죄, 자신의 잘못, 자신의 위선을 고백하며 “이러저러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구체적으로 짚어야 합니다. 고상하게 높은 곳에 앉아 있지 말고 내려와 회심의 물에 몸을 담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도 주로 그런 바리사이들과 조금은 닮지 않았나요? 어쩌면 우리는 남들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남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우리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느님이나 교회, 우리 형제자매가 날마다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도와줄 때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오직 이 경우에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으며 다른 경우에 그러면 안 됩니다. 대림시기는 우리 각자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고 겸손한 이들의 대열에 서는 은총의 때입니다. 우리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교만에서 벗어나는 은총의 때, 우리 죄와 감춰진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는 은총의 때, 우리가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은총의 때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이를 위한 유일한 길은 바로 겸손입니다. 곧 우월의식, 형식주의, 위선에서 정화되어 다른 이들이 우리의 형제자매이며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예수님 안에서 남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 오시는 구세주를 알아보며, 우리의 가난, 비참, 결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시 일어서고 용서받고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한 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합시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항상 다시 시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언제나 다시 시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분께서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지금은 회심의 때입니다.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내면에 이런 상황이 있어요. 이 문제가 저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 하지만 예수님께서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다시 시작하십시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시며 결코 우리에 대해 싫증 낼 줄을 모르십니다. 그분께서는 절대 싫증내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쉽사리 싫증을 내지만 그분께서는 결코 싫증을 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는 세례자 요한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대림시기를 여느 날들처럼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합시다. 바로 지금 이 대림시기가 은총의 때이고, 지금 여기 우리를 위한 은총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겸손한 종이신 마리아께서 우리로 하여금 겸손의 길에서 주님과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시길 빕니다. 겸손의 길이야말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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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12월 2022, 00:15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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