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위령의 날 미사 강론 “타협 없이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Adriana Masotti / 번역 이재협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이 위령의 날 미사 전례 독서를 해설하며 강조한 두 단어는 ‘기대’와 ‘놀라움’이다. 이날 제1독서인 이사야서는 우리의 큰 기대를 실현하시는 하느님을 묘사한다(이사 25,6-9). 제2독서인 로마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공동 상속자라고 전한다(로마 8,14-23). 끝으로 마태오 복음은 최후의 심판 날에 벌어질 일을 묘사한다(마태 25,31-46). 교황은 우리가 “하느님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살아간다”며,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온기를 느낄 그날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잃지 맙시다
교황은 강론을 시작하며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세상이라는 응접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천국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천국을 열망하자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우리는 천국을 열망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왜 지나쳐 사라져 버릴 것을 끊임없이 갈망하고 욕망과 필요를 혼동하는 위험을 감수하는지, 하느님을 기다리기보다 세상의 기대를 앞세우는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가는지 자문해 봅시다. 하지만 지나가는 바람을 쫓다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놓치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위를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을 향해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 아래에 있는 것들은 그곳을 향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경력, 위대한 성공, 높은 명망과 평판, 축적된 재산과 지상에서 모은 모든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말이죠.”
교황은 우리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지나가는 것들에 대해 걱정하고 슬퍼한다며 “하느님의 집을 향한 긴장을 늦추고 여행의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교황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경의 믿음, 곧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믿고 있는지, 또한 우리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혹은 불필요한 것들로 주의가 산만해지는지 각자 자문해 보라고 초대했다.
주님 앞에서 놀라게 될 우리
교황의 두 번째 키워드인 ‘놀라움’은 마태오 복음 25장에 나온다. 이 놀라움은 복음에 등장한 의인들이 “저희가 언제 주님께 물질적으로 자선을 베풀었고, 저희가 언제 영적으로 함께하며 도움을 드렸습니까” 하고 묻는 놀라움과 유사하다. 교황은 “‘저희가 언제 그랬나요?’라는 물음을 통해 모든 이의 놀라움이 드러난다”며 “의인들의 놀라움과 불의한 이들의 경악함이 폭로된다”고 지적했다.
“저희가 언제 그랬나요? 우리도 이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황과 지향을 언제나 명확하게 밝히도록 모든 요소를 검토해 정의의 깃발 아래 모든 것을 판결하는 법원에서 생명과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뤄지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로와 책임을 물으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의 법원에서는 자비가 가난한 이와 버림받은 이들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가장 작은 이들 안에 계시며, 하늘에 계시는 분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가운데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늘나라의 진정한 가치
가장 작은 이를 섬기는 것,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교황은 강론 중 원고에 없는 이야기를 즉석에서 전했다. 교황은 이날 아침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홀로 남겨지거나 버려진 아이들을 환대하는 집(고아원)을 운영하는 루터교 목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목사님은 편지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저의 소임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부모를 여의고 전쟁으로 이 세상에 혼자 남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분이십니다. 곧, 비극을 맞이한 가장 작은 이를 돌보라는 가르침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저는 매우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적었을 목사님의 편지를 읽으며 ‘주님, 당신께서는 끊임없이 하늘나라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 주시는군요’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심판의 기준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교황은 심판하시는 분이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시기에 최후의 심판이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 순간을 준비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보답할 수 없는 이”에게 “무상의 사랑을 베푸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 순간에 우리도 놀라지 맙시다. 복음의 맛이 변질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합시다.”
“우리가 편리와 안락을 위해 종종 예수님의 말씀을 약화시키고 그분의 메시지를 희석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복음과 타협하는 데 꽤 능숙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만하면 충분해.’ ‘거기까지 하자.’ 이처럼 우리는 복음 말씀과 타협합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당연히 줘야지. 그런데 기아 문제는 엄청 복잡해. 그러니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물론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지. 그런데 불의는 다른 특별한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야. 그러니 좀 기다려 보는게 낫겠어. (…) 아픈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 곁에 있어야지. 맞아. 하지만 신문과 소셜미디어에는 시급한 일이 더 많아.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들에게 신경을 쓸 수 있겠어? 이주민, 당연히 환대해야 하지. 하지만 난민 문제는 정치와 관련된 매우 복잡한 문제잖아.’ 우리는 늘 이렇게 타협합니다. 처음에는 언제나 ‘맞는 말이야’라고 대답하지만, 결국에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매우 자주 ‘그러나’, ‘하지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러나’와 ‘하지만’의 힘을 빌어 복음과 타협합니다.”
“저희가 언제?” “지금입니다”
교황은 “우리가 스승이신 예수님의 단순한 제자가 되기보다, 논쟁은 많이 하고 행동은 적게 하는 복잡함의 대가”가 됐다고 한탄했다. 교황은 실천은 하지 않고 논쟁만 하는 사람을 두고 “가난한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를뿐더러” 그들을 방문한 적도, 입을 것이나 먹을 것을 내어준 적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이날 복음에서 의인들과 불의한 이들이 입을 모아 “저희가 언제 그랬나요?”라고 주님께 묻는 질문에 오직 하나의 대답만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대답은 단 하나입니다. 그 ‘언제’는 바로 지금, 오늘, 이 미사가 끝나는 순간입니다. 바로 지금, 오늘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손에, 우리 자비의 활동에 달려 있습니다. 그 대답은 명확한 설명이나 세련된 분석, 개인적·사회적 정당성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곧,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고, 우리의 책임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죽음이 삶의 진리를 드러내며, 죽음을 통해 자비로써 예수님의 말씀을 약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제거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교황은 “우리가 뒤늦게 ‘몰랐다’고 대답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강론을 끝맺었다. “복음은 기대를 품고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의 놀라움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단, 우리가 지금 가난하고 상처입은 세상의 형제자매들 가운데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놀라워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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