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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교만을 경계합시다. ‘내’가 너무 커진 곳에 하느님 자리는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0월 23일 연중 제30주일 삼종기도를 통해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풀이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만하는 반면, 세리는 겸손하게 멀찍이 서서 용서를 구한다. 두 사람 모두 성전에 올라가지만 한 사람의 기도만 하느님께 이르렀다. 교황은 신자와 신부, 심지어 주교들까지도 항상 입에 달고 사는 ‘나’라는 말을 남발하게 만드는 자기애와 자기과시욕을 경계하라고 당부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전례의 복음은 우리에게 바리사이와 세리를 두 주인공으로 하는 비유를 들려줍니다(루카 18,9-14 참조). 곧, 한 사람은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타공인 죄인입니다. 두 사람 모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지만, 오직 세리의 기도만 참으로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그가 겸손하게 자기 자신의 진실 속으로 내려와 자기 자신의 궁핍한 모습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유가 ‘올라가다’와 ‘내려가다’라는 두 동사로 표현되는, 두 움직임으로 이뤄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움직임은 ‘올라가다’입니다. 실제로 성경 본문은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10절)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측면은 주님을 만나려고 그분이 계신 산으로 올라가는 성경의 많은 일화를 떠올립니다. 아브라함은 제사를 바치기 위해 산에 올라갑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에 올라가시어 거기서 거룩하게 변모되십니다. 그러므로 올라간다는 것은, 주님을 만나려면 우리 마음이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필요성을 표현합니다. 우리 ‘자아’라는 땅에서 일어나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 ‘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 골짜기의 모든 것을 거두어 주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이것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올라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삶으로 주님과 만나고 기도로 변화되려면, 다시 말해 하느님께 우리를 들어올리기 위해서는, 두 번째 움직임인 ‘내려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주님께로 올라가려면 우리 내면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곧, 우리 나약함과 내적 가난을 바라보게 하는 마음의 겸손과 솔직함을 함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겸손을 통해 우리 마음을 짓누르는 한계와 상처, 죄와 결핍을 가식 없이, 우리의 진짜 모습을 하느님께 보여드릴 수 있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를 낫게 해 주시라고, 고쳐 주시라고, 일으켜 주시라고 주님의 자비를 청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내려올수록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더 높이 들어올리십니다. 

실제로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겸손하게 거리를 두고 멀찍이 서서(13절 참조) – 그는 가까이 오지 못하고 부끄러워합니다 – ,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반면, 바리사이는 스스로 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스스로를 치켜 세우며 자만합니다. 그는 꼿꼿이 서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주님께 말씀드리기 시작합니다. 자화자찬하고, 자신의 모든 종교적 선행을 나열하고,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깁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 이것은 영적 교만이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신부님, 왜 저희에게 영적 교만에 대해 말씀하세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 이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여러분이 스스로 잘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며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영적 교만입니다. “저는 잘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지만, 저는 그 사람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 이처럼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 하느님을 저버리면서 자기 자신의 주변만 맴돕니다. 이는 겸손 없이 바치는 기도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바리사이와 세리는 우리 자신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바라봅시다. 바리사이처럼 혹시 우리 안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9절)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내적 교만은 없는지 살펴봅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타인의 찬사에 기대고 언제나 우리의 공적과 선행을 늘어놓을 때,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연연할 때, 자기애(나르시시즘)와 자기과시욕에 사로잡힐 때 그런 일이 생깁니다. 허영심을 바탕으로 한 자기애와 자기과시욕을 경계합시다. 우리 모두, 신자와 신부, 심지어 주교들까지도 항상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나”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 일을 했고, 내가 그걸 저술했고, 내가 그 말을 했고, 내가 당신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등입니다. ‘내’가 너무 커진 곳에서 하느님의 자리는 거의 없습니다. 저의 모국에서 이런 사람들을 “나와 함께 나를 위해 오직 나만(yo mí, me, conmigo)”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그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한 번은 사람들이 자기 위주로 살던 어떤 신부님을 두고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신부님은 분향을 할 때 거꾸로 하더군요. 자기 자신에게 향을 치는 겁니다.” 이렇게 웃음거리가 되고 맙니다. 

주님의 겸손한 여종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 전구를 청합시다. 성모님께서는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살아있는 형상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십니다(루카 1,5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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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0월 2022, 22:54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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