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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자장가’가 아니라 행동하기 위해 지핀 불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 14일 연중 제20주일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생의 도전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않으시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신앙의 불꽃을 다시 지피라고 초대”하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복음은 하느님과 형제자매들에게 마음을 열게 하는 ‘부단함’에 불을 지핀다고 말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전례의 복음에는 항상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우리를 시험대에 올리는 예수님의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무슨 불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가져오시는 불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마치 불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역사 속으로 파고들 때에는 삶의 낡은 균형을 불태우고,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이기심을 극복하도록 도전하게 하며, 죄와 죽음의 종살이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건너가도록 도전하게 하는 메시지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지 않습니다. 복음이 지나갈 때, 그 말씀을 경청하고 받아들인다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변화를 일으키고 회심으로 초대합니다. 거짓된 내적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정에 나서고 하느님과 형제자매들에게 마음을 열게 하는 ‘부단함(inquietudine)’에 불을 지핍니다. 불과 같은 것입니다. 곧,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 사랑으로 따뜻하게 해주지만, 우리의 이기심을 불태우고 삶의 어두운 측면을 비추며 – 우리 모두 이런 어두운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 우리를 노예로 삼는 거짓 우상들을 소멸시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 예를 들어 엘리야 예언자와 예레미야 예언자를 생각해봅시다 –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불로 타오르시어 그 사랑의 불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시려고 끝까지, 곧 죽을 때까지,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필리 2,8 참조) 사랑하시면서 스스로를 불태우십니다. 그분께서는 불에 비유되는 성령으로 가득 차시어 그분의 빛과 힘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로운 얼굴을 드러내시고, 잃었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충만함을 주시며, 소외의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영육의 상처를 낫게 하시며, 외적인 신심실천으로 축소된 신앙심을 새롭게 하십니다. 이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불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바꾸시고 정화시키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 각자에게 – 나에게, 여러분에게, 당신에게 – 무슨 의미가 있나요? 불에 대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나요? 신앙이 부차적인 문제나 개인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도록 신앙의 불을 다시 지피라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도전이나 교회와 사회에 대한 헌신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말한 것처럼, 실제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우리를 안심시키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안심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곧, 착각 속에 빠져 살거나 현실에 안주하게 하지 않고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앙리 드 뤼박, 『하느님의 길에 관해』, 밀라노 2008년, 184쪽). 한마디로 신앙은 우리를 잠들게 하는 “자장가”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이란 불입니다. 밤에도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살아있는 불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물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는 복음에 열정적인가? 나는 복음을 자주 읽는가? 나는 복음서를 지니고 다니는가? 내가 고백하고 찬양하는 신앙이 나를 자기만족적인 평온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내 안에 증거의 불꽃에 불을 붙이는가? 우리는 교회로서 다음과 같이 물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성령의 불이 타오르는가? 기도와 사랑, 신앙의 기쁨에 대한 열정이 타오르는가? 아니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피곤하고 침울한 얼굴을 하면서 불평하며 온종일 험담을 늘어놓는가? 형제자매 여러분, 이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불로 타오르고 있으며 그 불을 온 세상에 “지르려” 한다고 말이죠. 그리하여 모든 이가 아버지의 온유한 사랑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마음을 넓히고 –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을 넓히십니다! – 인생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이를 위해 거룩하신 동정녀께 기도합시다. 성령의 불을 받아들이신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전구해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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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8월 2022, 12:09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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