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교황 담화 “강대국의 으름장이 평화 외치는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억누릅니다”
Salvatore Cernuzio / 번역 이창욱
코로나19 대유행의 “폭풍”으로 “빈곤에 빠진 사람들”, ‘초강대국’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의지를 강요”하는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실향민, 피란민, 극빈자로 전락한 사람들, 이 모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6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2022년 11월 13일) 교황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 초반부터 교황은 우리 시대 빈곤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전쟁에 방점을 찍었다. 교황은 코로나19 대유행에서 벗어나면서 “맑게 개인 하늘”이 열리는가 했더니 이제 아주 다른 판세를 우리 세상에 강요하는 새로운 “재앙”이 눈앞에 나타났다고 말했다.
강대국의 협박과 인류의 목소리
교황은 100일 넘게 이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이 “최근 몇 년 동안 죽음과 파괴를 불러 일으키는 지역 전쟁의 목록에 더해졌다”면서도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고 말했다.
“비극적인 기억의 장면들이 반복되고 일부 강대국들이 서로 으름장을 놓으면서 평화를 외치는 인류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억누르고 있습니다.”
약하고 무방비한 이들이 받는 영향
“무의미한 전쟁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얼마나 많이 생기는지요!” 교황은 이 같이 탄식했다. “어디를 보든 우리는 무방비 상태의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폭력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 특히 어린 소년 소녀들이 자신들의 뿌리에서 잘려 나와 또 다른 정체성을 강요받기 위해 쫓겨나고 있습니다.”
“수백만 명의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 난민이 되어 이웃나라에서 피난처를 찾기 위해 폭격의 위험을 무릅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쟁지역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식량, 식수, 의료 돌봄의 결핍, 특히 애정 결핍과 함께 겁에 질린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호활동의 피로
이러한 상황에선 “이성이 흐려진다”고 지적한 교황은 “그 여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대열에 합류한 평범한 이들”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교황은 “분쟁이 오래 지속될수록 그 결과는 더 나빠진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최근 몇 년 동안 “모든 주민들”이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이제는 우크라이나에서 온 수백만 명의 난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문을 활짝 열었다. “다른 가족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집 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통제할 수 없는 가혹한 현실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환대하는 사람들은 구호활동을 지속하는 것이 갈수록 어렵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가정과 지역사회는 비상사태를 넘어선 상황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초심을 새롭게 할 때”라고 교황은 격려했다. “우리가 시작한 일은 똑같은 책임의식으로 완수해야 합니다.” 교황은 이것이 ‘연대’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이들과 함께 나누어, 아무도 고통받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의식과 친교 의식을 삶의 방식으로 삼을수록 연대 의식도 성숙합니다.”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말고 실천하십시오
교황은 이 외에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일부 국가에서 넉넉한 살림과 안정된 삶을 누리는 가정이 현저하게 늘어났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자유와 책임, 형제애와 연대의 가치를 계속 지켜가도록 합시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항상 이웃사랑, 믿음, 희망을 우리 삶과 행동의 기초로 삼도록 합시다.” 여기서 “행동”이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있어 핵심어다.
“가난한 이들 앞에서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말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접 참여함으로써 신앙을 실천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는 누구에게도 위임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돈의 오용
교황은 많은 경우 “일종의 안일함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으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관심과 같은 일관성 없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자신들의 재산과 소유물을 오용하는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약한 믿음, 미미하고 근시안적인 희망을 드러냅니다.”
돈은 그 자체로 문제되지 않는다. 우리 일상생활과 사회관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교황은 돈이 아니라 우리가 돈에 걸고 있는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돈에 대한 집착은 일상을 현실적으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눈을 흐리게 하여 다른 이들의 필요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지역사회에게 있어 돈의 우상에 현혹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없습니다. 돈이라는 우상은 결국 우리를 덧없고 파산한 삶의 전망에 얽매이게 합니다.”
활동주의는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지 정신”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접근하는 것도 해답은 아니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활동주의가 아니라 신실하고 너그러운 관심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 형제자매로서 손을 내밀게 합니다. 그 손길이 내가 빠져 있던 무기력함을 떨쳐버릴 수 있게 해 줍니다.”
새로운 사회정책
교황은 “사회 정책적 접근을 넘어서는 새로운 해결책”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책이지만, 결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정책도 가난한 이들의 정책도 아니고, 더욱이 국민들을 다시 통합하는 계획과도 거리가 먼, 사회 정책이라는 사고방식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역설, 인간적인 사고방식과 충돌하는 역설이 있습니다. 곧, 우리를 부유하게 하는 가난의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 최근 몇 년 동안 우리가 겪었던 한계와 나약함, 그리고 이제 그 세계적 파장을 동반한 전쟁의 비극은 우리에게 한 가지 결정적인 것을 가르쳐 줍니다. 곧,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이가 품위 있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가난
예수님께서는 몸소 “굴욕을 주고 죽이는 가난”이 있는 반면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또 다른 가난, 곧 그리스도의 가난”이 있다고 가르쳐 주신다. “불의와 착취, 폭력과 자원의 불공정한 분배가 사람을 죽이는 가난을 낳습니다. 미래의 전망도 탈출구도 제시하지 못하는 버리는 문화에 의해 강요된, 절망적이고 헤어나올 수 없는 가난입니다.”
“하루를 마감하며 이익을 정산하는 것이 유일한 법칙이 될 때, 다른 사람들을 한낱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더 이상 정당한 급여나 적절한 노동시간 같은 것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노예살이가 나타나 대안이 없는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립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지독한 불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롭게 하는 가난
이와 반대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가난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려는 책임 있는 결정에서” 나온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가난한 이들과의 만남은 우리의 숱한 근심과 공허한 두려움을 끝낼 수 있게 하고,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 아무도 우리에게서 앗아갈 수 없는 보화, 곧 거저 주어진 참된 사랑에 다다를 수 있게 해 줍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자선활동의 대상이기 이전에, 우리를 근심과 피상적인 덫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주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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