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 교황의 탄원 “형제를 죽이려고 치켜든 손을 내려놓게 하소서”

1만 명 이상이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2년 만에 콜로세움에서 바치는 십자가의 길 예식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과 기도했다. 올해 십자가의 길 기도 묵상엔 일상적 가정생활의 해체, 우크라이나 전쟁이 불러온 ‘공포’에 대한 규탄, 이주민 부부의 증언 등이 담겼다. 미리 준비된 제13처의 묵상글은 수정됐다. “죽음 앞에선 말보다 침묵이 더 웅변적입니다.”

Salvatore Cernuzio / 번역 박수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원수들이 서로 손을 내밀게 하시어 서로 용서하도록 하소서. 형제를 죽이려고 치켜든 손을 내려놓게 하시어 증오가 있는 곳에 화합이 꽃피게 하소서.”

“잔혹함”과 “신성모독적”인 전쟁으로 처참하게 상처 입은 2022년, 골고타 언덕으로 향하는 그리스도의 여정을 기억하는 ‘십자가의 길’ 기도 여정은 1만여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촛불로 밝혀진 포리 임페리알리 거리에서 시작됐다. 콜로세움 위에 어둠이 내려앉자 확성기에서 형제를 죽이려고 치켜든 손을 내려놓게 해 달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탄원이 울려 퍼졌다. 이어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출신의 가정들이 삶의 묵상을 통해 일상적인 가정생활의 단편을 공유했다.

교황의 십자가의 길 예식을 위해 콜로세움에 운집한 1만 명의 신자들
교황의 십자가의 길 예식을 위해 콜로세움에 운집한 1만 명의 신자들

다시 콜로세움에서

흰색 외투를 입은 교황은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모은 채 간절히 기도했다. 때때로 눈을 손으로 가리기도 했다. 교황의 뒤편에 있는 횃불들은 전통적으로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의 유적 앞에 세워진 거대한 십자가를 밝히고 있었다. 바실리카는 콜로세움에서 포로 로마노를 거쳐 캄피돌리오 언덕에 이르는 비아 사크라(Via Sacra) 중간에 위치해 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처럼 행동하지 않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콜로세움에서 바치는 십자가의 길 예식 전통은 1964년 이후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 2년 만에 교황의 목소리가 다시 콜로세움에서 울려 퍼졌다. 콜로세움에서 바치는 십자가의 길 예식 전통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포리 임페리알리 거리에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까지 이어지는 길과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의 웅장한 모습 아래 고대 교회의 “열심한 신심 행위”를 다시 회복하려는 데서 비롯됐다. 지난 2년 동안 십자가의 길 예식은 텅 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신자들만 참례한 가운데 거행됐다. 올해 4월 15일 저녁에는 가족과 함께한 수많은 사람들이 교황과 함께 기도했다. 로마교구 총대리 안젤로 데 도나티스(Angelo De Donatis) 추기경과 로마교구의 보좌 주교들도 동행해 14처를 함께 기도했다.

십자가의 길 예식에 참례한 신자
십자가의 길 예식에 참례한 신자

일상적인 가정생활

십자가 아래에서 각 가정은 그들의 한계와 문제, 기대치에 대한 실망, 자녀 교육, 불안정한 삶, 고향과의 이별, 부부의 꿈 포기, 자녀의 신체·정신적 장애 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사회적 편견과 “부당한 판단”이 더해진 삶을 재건하기 위한 노력을 봉헌했다. 또한 가정들은 손주들을 물리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두려움, 항암치료에 대한 두려움, 배우자 사망 이후 홀로 살아가야 하는 두려움도 하느님께 의탁했다. 이는 조부모, 신혼부부, 다자녀 부모, 소자녀 부모, 병든 자녀를 둔 부모, 성직자를 자녀로 둔 부모, 자녀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외침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주민, 선교사, 공동생활가정(그룹홈) 책임자다. 이 가정들의 묵상은 모든 사람이 공감하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일상적인 가정생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전례 예식을 전 세계로 생중계하는 카메라들은 생각에 잠긴 얼굴들과 마스크 너머의 반짝이는 눈들을 빠짐없이 담았다.

고통 앞에서 침묵

도시 한복판으로 쏟아진 군중의 물결 속에서 공포, 빈곤, 불안정을 초래하는 분쟁에 대한 규탄이 나왔다. 이러한 분쟁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성, 어머니, 아내의 끔찍한 모습을 전 세계로 퍼뜨린다. 그들은 폭격 아래에서 출산하거나 죽어간다. 그러한 두려움과 평화에 대한 희망이 공존하는 제13처의 십자가 아래에서는 골고타 언덕에서와 같이 형제애를 다시금 발견하는 몸짓으로 두 여인이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우크라이나인 이리나 씨와 러시아인 알비나 씨는 친구이자 동료다. 두 손으로 나무 십자가를 들고 가는 이들의 모습은, 모든 논쟁을 넘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하느님의 본질과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구현한다.

침묵의 순간에 맞이한 강렬한 모습도 있다. 미리 준비된 제13처의 묵상글은 다소 수정됐다.

“죽음 앞에선 말보다 침묵이 더 웅변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침묵하며 각자 세상의 평화를 위해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교황청 공보실장 마테오 브루니는 “이는 침묵과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묵상글을 최소한으로 수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십자가의 길 제13처에서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러시아인 알비나 씨와 우크라이나인 이리나 씨
십자가의 길 제13처에서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러시아인 알비나 씨와 우크라이나인 이리나 씨

“우리는 ‘이주민’ 그 이상... 우리는 사람”

감동적인 순간도 있다. 페데리코(4세)와 리카르도(11개월) 두 자녀와 함께 제14처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두 콩고인 부부 이레네 씨와 라울 씨의 경험이 그러하다. 난민 신분으로 콩고에서 이탈리아로 도착한 그들은 환대 공동체인 첸트로 아스탈리(Centro Astalli)의 도움을 받아 이제 막 자립했다. 그들은 묵상글을 통해 “우리의 과거는 죽었다”며 “우리는 우리 땅에서 살고 싶었지만 전쟁이 우리를 가로막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오랜 여행 중 여성과 어린이, 친구, 형제자매가 죽는 것을 보았고, 지금 여기에 생존자로 와 있습니다. 우리는 ‘짐’으로 간주됩니다. 우리는 고국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지만 여기선 단순히 숫자나 이주민 무리 중 하나로 취급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이주민’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위해 매일 최선을 다합니다. 아이들이 이곳에서 폭탄, 피, 박해 없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교황
기도하는 교황

교황의 기도

십자가의 길 예식이 끝날 무렵 교황이 차분하고 엄숙한 어조로 기도했다. 그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며” 모든 사람의 회심을 바라시는 하느님께 “거역하는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며 “우리가 평화의 계획을 따르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했다. 한 남성이 “교황 만세”라고 외치자 사람들의 박수가 뒤따랐다. 그러나 이번 십자가의 길 예식은 무엇보다도 침묵하라고 초대한다. 이날 교황이 이탈리아 공영방송 라이(Rai)의 프로그램 “당신의 모상대로(A Sua Immagine)”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유일한 응답은 침묵이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15 4월 2022, 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