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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은 항상 기쁘게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3월 27일 사순 제4주일 삼종기도 훈화에서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실 때 잔치를 벌이신다”고 강조하며 단순히 의무사항과 금지조항으로 이뤄진 종교생활의 오류에 빠지지 말라고 당부했다. 교황은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다시 받아들이시고 기쁨으로 잔치를 벌이시는 하느님의 온유한 사랑을 배우자고 권고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주일 전례의 복음은 이른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들려줍니다(루카 15,11-32 참조). 이 비유는 항상 연민과 온유한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용서하십니다. 항상 말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구하는 데 지치지만 하느님께서는 항상 용서하십니다. 비유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심을 말해줍니다. 자기 재산을 모두 허비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다시 받아들이시는 아버지, 그 아들을 위해 기쁨으로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아들입니다. 아버지께서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무척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이 아버지 앞에서 위기로 치닫는 큰아들도 같은 비유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위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큰아들도 우리의 내면에 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큰아들의 편을 들고 싶어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의무를 다했습니다. 집을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토록 못되게 굴었던 아우를 아버지가 다시 안아주는 모습을 보고 화를 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항의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 저 아들을 위해서는 잔치를 벌이시는군요!”(루카 15,29-30 참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요.” 이것이 큰아들의 분노입니다.

이 말들이 큰아들의 문제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오로지 ‘명령’의 순수한 준수와 의무감에 바탕을 두고 아버지와 관계를 맺습니다. 이는 우리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문제와 하느님과 관계 맺는 문제 말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아버지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금지조항과 의무사항으로 점철된 종교생활, 동떨어진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리두기에서 우리가 더 이상 형제와 자매로 보지 않는 우리의 이웃에 대한 경직성이 나옵니다. 사실, 비유에서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제 아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죠. 자기 아우를 ‘저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그는 제 아우가 아닙니다’ 하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비유의 마지막에 가서 그 큰아들은 집 밖에 있으려고 하는 위험에 빠집니다. 실제로 성경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루카 15,28). 왜냐하면 집에 다른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31절).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자녀들이 자신의 삶의 전부라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이를 잘 아는 이들은 부모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느끼시는 바를 매우 가깝게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소설에서 한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아버지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을 이해했다네”(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밀라노 2004년, 112쪽).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마음을 열고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 두 가지는 명령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잔치를 벌이고) 기뻐해야 한다”(32절 참조). 우리 마음에도 아버지의 두 가지 요구가 있는지 살펴봅시다. 곧, ‘즐기는 것(잔치를 벌이는 것)’과 ‘기뻐하는 것’입니다.

먼저 ‘즐기는 것(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곧, 잘못을 뉘우치거나 참회의 여정에 있는 사람, 위기에 빠져 있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우리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해야 하나요?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죄를 기억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낙담을 극복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종종 마음의 가책을 느낍니다. 거리두기, 무관심, 매몰찬 말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처럼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신부님, 이 사람은 많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럴수록 따뜻하게 맞아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나요?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나요? 그 사람들과 즐기려고 하나요? 열린 마음, 진실된 경청, 맑은 미소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잔치를 벌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좋아, 아들아. 집으로 돌아가거라. 일터로 돌아가거라.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가서 정신 차리고 네 일에 몰두해라!’ 이런 말이 좋은 용서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실 때 잔치를 벌이십니다! 아버지가 즐거운 잔치를 벌인 것은 아들이 돌아왔다는 기쁨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처럼 우리도 ‘기뻐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과 일치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의 뉘우침을 볼 때 기뻐합니다. 그의 죄가 크게 심각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사람의 잘못에 집중하지 않고, 그 사람이 저지른 악행을 지적질하지 않으며, 선에 대해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선은 나의 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뻐하는 법을 알고 있나요?

꾸민 이야기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3, 4년 전에 ‘돌아온 아들’이라는 주제로 전체 이야기를 대중 연극으로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가려고 결심했을 때, 친구를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거부하실까 두려워.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까 두려워.”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조언합니다. “네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씀드려봐. ‘아버지, 저는 뉘우치고 있습니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만, 아버지께서 반겨주실지 확신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받아주신다면 창문에 하얀 손수건을 걸어주십시오.’” 그런 다음 그는 집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굽은 길 끝자락에 있는 집에 가까이 왔습니다. 그는 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보았을까요? 한 장의 손수건이 아니었습니다. 창문마다 서너 개씩 하얀 손수건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같이 우리를 받아들이십니다. 온전하게 받아들이시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뻐할 줄 아나요? 동정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시어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이웃을 바라볼 수 있는 빛이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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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3월 2022, 23:06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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