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성 생활의 날, 교황 “경직성은 병적 집착” “위기와 숫자의 감소는 우리의 쇄신 위한 초대”
Salvatore Cernuzio / 번역 김호열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이 축성 생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표징들을 잘 살펴보라고 강조했다. 그 표징들은 △온갖 위기 △감소하는 숫자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욕 상실 등이다. 아울러 두려움이나 옛일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비”되지 말라고 지적하는 한편, 언제나 “병적인 집착”이기 마련인 뻣뻣하고 경직된 태도에 빠져들지 않으면서 변화를 향해 나아가도록 재촉하는 “축성 생활의 쇄신된 전망을 함양하라”고 권고했다. 교황은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을 맞아 ‘축성 생활의 날’을 지내는 전 세계 수도자들에게 미래를 위한 원동력을 이 같이 불어넣었다. 미사 중 영성체 순간에 이르러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동방 가톨릭 교회 라파엘 베드로스 21세 미나시안(Raphael Bedros XXI Minassian) 총대주교와 함께 ‘교회적 친교’가 나타났다. 그것은 단순하지만 의미 있는 몸짓, 곧 영성체에 앞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미나시안 총대주교가 그리스도의 성체가 담긴 성반과 그리스도의 성혈이 담긴 성작을 함께 들어 올린 다음 함께 영성체를 하는 모습이었다.
교황은 남녀 축성 생활자들에게 공동체 생활 안에 숨어있는 유혹을 경계하라고 강조했다. 자아도취적 이기주의자의 모습, 주인공으로 나서서 눈에 띄고자 하는 욕망, 형제자매들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유혹 등이다. 교황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해독제가 “놀라움”이라고 설명했다.
성소의 불꽃
남녀 수도자들의 손에 들린 희미하게 깜박이는 촛불이 성 베드로 대성전을 가득 채운 가운데 미사가 시작됐다. 그들 중에는 몇몇 주교와 추기경도 있었다. 그들의 손에서 희미하게 깜박이는 불빛은 모든 연령대의 남녀들이 수도 생활을 받아들이도록 자극한 성소(부르심)의 가장 생생한 불꽃의 표징이다. 교황이 느린 걸음으로 대성전에 입장하는 동안 성가대는 ‘영광스러운 빛이시여(O, Luce radiosa)’를 노래했다. 교황은 복사단과 함께 ‘성 베드로 사도좌 제대’로 행렬하며 들어갔다. 그곳에서 교황은 미사에 참례한 이들이 들고 있던 초를 축복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없이
교황의 강론은 전반적으로 시메온과 한나의 모습에 집중돼 있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 곧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두 노인”이다. 특별히 그들의 모습은 축성 생활자들의 여정을 가리킨다. 곧, 보다(vedere), 행동하다(muoversi), 환대하다(accogliere)이다. 교황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표징들”을 보내주신다며,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축성 생활의 ‘쇄신된 전망’을 함양”할 수 있게 초대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러한 표징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보되, 성령의 빛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징들을 못 본 척하거나, 늘 하던 대로 살거나, 무기력하게 과거의 타성에 젖거나,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비된 채 계속해 나갈 수 없습니다.” 교황은 “우리의 안위를 위해 혹은 두려움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나의 신앙이나 창립자의 카리스마를 보존하려고 뒷걸음질치는 것”이 오늘날의 유혹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것이 유혹입니다. (...) 뒷걸음질치면서 뻣뻣하게 ‘전통’을 지키려 하는 유혹 말입니다.”
보기와 쇄신하기
교황은 시메온의 두 눈이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며, 그가 과거의 타성에 젖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현재와 미래의 현실에 눈을 크게 떠야 한다고 말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위기 한가운데에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아울러 성소자들의 부족 현상이라는 위기를 통해서도 눈을 크게 떠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신부님, 성소자들이 없습니다. 이제 인도네시아의 몇몇 섬으로 가서 성소자들을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 아닙니다. 과거의 타성에 젖어있으면 우리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비되고 맙니다.” 교황은 수도회 구성원들의 “의욕 상실”도 살펴봐야 한다고 권고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온갖 나약함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의 삶과 우리 공동체를 쇄신하라고 초대”하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십니다. 용기를 내고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마음을 활짝 엽시다.” 교황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두고 탄식하며” 허송세월을 보내지 말고 “도래할 미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려야 한다고 말했다. “어제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주님 앞에서 경배하며 선을 볼 줄 아는 눈을 청하십시오.”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
교황은 우리의 시선을 바꾸라고 초대했다. “우리 자신, 다른 사람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상황, 심지어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선입니다. 이는 순박한 시선이 아니라 지혜로운 시선입니다. 순박한 시선은 현실을 도피하거나 문제를 보고도 못 본 체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시선은 ‘내면을 보고’, ‘저 너머를 볼 줄’ 압니다. 이러한 시선은 겉모습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나약함과 실패의 틈새 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하느님의 현존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축성 생활은 아까운 인생이 아닙니다
교황은 세월이 흘러도 시메온의 눈에 주님이 보였다며, 시메온과 한나의 눈이 “구원을 본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저마다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내 눈은 무엇을 보는가? 축성 생활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세상은 종종 축성 생활을 ‘아까운 인생(spreco)’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괜찮은 젊은이가 수도자가 된다고요? 저렇게 괜찮은 젊은이가 수녀가 된다고요? 참 아깝네요. 차라리 못생기기라도 했으면 몰라도 (...) 아깝네요!’ 그런데 우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은 어쩌면 축성 생활을 과거의 잔재나 쓸모없는 것으로 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 우리 남녀 수도 공동체는 무엇을 보나요?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만 그리워하고 있나요? 아니면 내면과 저 너머를 신앙의 시선으로 멀리 내다볼 수 있나요?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움직임
교황은 성령께서 그러한 지혜를 주신다고 설명했다. “성령께서는 엄청나게 큰 일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 혹은 힘의 과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작음과 나약함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활동을 알아차리게 해 주십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도 움직이신다. “성령에 이끌려(mosso dallo Spirito)”(루카 2,27)라는 표현은 영성신학이 말하는 “영적 이끌림(mozioni spirituali)”이다. 이는 곧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식별하게 하는 우리 “마음의 움직임(moti dell’animo)”이라고 교황은 덧붙였다.
“성령께서는 어린아이의 작음과 나약함 안에서 하느님을 인식하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축성 생활을 결과, 목표, 성과 측면으로만 생각하는 위험에 빠지곤 합니다. 우리는 영향력, 가시성, 수치만 추구합니다. 이는 유혹입니다.”
기계적 반복
하지만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충실함을 함양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길 원하신다”고 교황은 말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자기 자신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무엇이 우리 일상을 움직이게 하나요?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랑은 무엇인가요? 성령이신가요, 아니면 순간의 욕망인가요? 교회와 사회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나요? 때로는 심지어 좋은 일을 한 이면에도 자아도취적 이기주의자의 모습이나 주인공으로 나서서 눈에 띄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황은 또 다른 위험도 경고했다. 교황은 수도 공동체가 “성령에게 열정적으로 마음을 열기보다 기계적으로 반복하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며 “그저 바쁘게 사는 삶을 유지하고 그렇게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늘 우리의 내적 동기를 살피고 ‘영적 이끌림’을 식별합시다. 왜냐하면 축성 생활의 쇄신은 무엇보다 이 과정을 거쳐가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부족하지 않도록 환대합시다
교황은 축성 생활자들이 “영롱한 눈으로 계속 미소 지으며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남녀 노인 축성 생활자들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도록 격려했다. “연로한 수사님과 수녀님들을 방문해 그분들을 찾아 뵙고,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고, 조언을 구하고, 그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듣는다면 우리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에게 좋은 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행동은 환대하는 것이다. 교황은 “때때로 우리가 방향을 잃고 수많은 일에 휘말리며 부차적인 문제에 집착하거나 일중독에 빠지는 위험에 처해 있다”면서 “하지만 모든 것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하는 분”이라고 말했다.
“남녀 축성 생활자들이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말에 인색하고, 기쁨이 없고, 열정이 없고, 형제적 삶이 그저 고역이라 생각하고, ‘놀라움’이 없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잘못이라거나 다른 무엇이 잘못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우리의 두 팔이 더 이상 예수님을 껴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축성 생활자의 두 팔이 예수님을 껴안고 있지 않을 때, 그들은 다른 것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 합니다. 하지만 결국 공허한 마음만 남게 됩니다.”
마음에 맺힌 응어리와 불평불만
교황은 우리가 예수님을 껴안지 않을 때 “마음에 응어리가 맺힌다”고 말했다. 이어 강론 원고를 내려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응어리가 맺힌 축성 생활자들을 보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들은 제때에 잘 돌아가지 않는 일에 대한 불평불만에 스스로 갇혀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무언가에 대해 불평합니다. 원장, 형제, 공동체, 식사 등입니다. 그들은 불평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를 두 팔 벌려 껴안지 않아 마음에 응어리가 맺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융통성 없는 경직성과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태도”로 불평불만에 빠진다. 하지만 교황은 우리가 두 팔 벌려 그리스도를 껴안는다면 “신뢰와 겸손으로” 다른 사람들도 껴안고 환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야 갈등이 가중되지 않을 것이고, 형제자매들을 짓밟고 그들의 존엄성을 훼손하려는 유혹이 극복될 것입니다. 그러니 형제자매들을 두 팔 벌려 맞아들입시다. 거기에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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