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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주의와 완고함에서 자유로워지는 기쁨”

프란치스코 교황이 2월 13일 ‘참행복의 주일’인 연중 제6주일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물질 재화를 넘어 삶의 선물을 발견하고,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확신에서 벗어나라고 초대했다. 목표는 “편견과 완고함과는 거리가 먼 겸손하고 열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에게 둘러싸이셨음에도 ‘당신 제자들을 보시며’ 참행복을 선포하신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전례의 복음 중심에는 참행복(le Beatitudini)이 있습니다(루카 6,20-23 참조).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에게 둘러싸이셨음에도 “당신 제자들을 보시며”(20절) 참행복을 선포하신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분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참행복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정의합니다. 참행복이란 제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거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본다면, 그 답은 바로 참행복입니다. 다른 모든 참행복의 기초가 되는 첫 번째 참행복을 봅시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20절).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그들이 행복하다는 사실과 그들이 가난하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의 제자는 돈과 권력 혹은 다른 물질적인 재화에서 자신의 기쁨을 찾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매일 받는 선물, 곧 생명, 피조물, 형제자매 등에서 자신의 기쁨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들이 삶의 선물입니다. 제자는 하느님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재화마저 나누어 갖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논리는 무엇일까요? 무상(gratuità)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무상으로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가난이 삶의 의미에 대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는 삶의 의미를 소유할 생각을 하거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날마다 삶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입니다. 곧, 매일 배워야 한다는 자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러한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편견과 완고함과는 거리가 먼 겸손하고 열린 사람입니다.

지난 주일의 복음에 아주 좋은 사례가 있었습니다. 숙련된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가 평상시와 다른 시간에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입니다. 그런 다음 기적처럼 많은 물고기를 낚은 것을 보고 몹시 놀라 배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면서 온순함을 드러내고, 이렇게 제자가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 자신의 안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은 단지 “내가 그분께 동의하고 그분이 나에게 동의”하는 조건에서만 예수님을 조금 따릅니다. 하지만 그 외 다른 문제에 관해서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제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에 빠집니다. 그들은 주님의 요구가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슬퍼하고, 현실이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거나 현실에 불만을 품기 때문에 슬퍼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는 자기 자신을 살필 줄 알고, 겸손하게 매일 하느님을 찾을 줄 알며, 이를 통해 현실에 깊이 파고들어 현실의 풍요로움과 복합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제자는 ‘참행복의 역설’을 받아들입니다. 참행복이란 가난한 사람들, 많은 것이 부족하고 또 그것을 아는 사람이 복되다는 것, 다시 말해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곧, 부유하고 재산이 많은 사람, 사람들에게서 박수갈채를 받고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으며 온갖 보증을 확보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이지, 참행복의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반대로 세속적인 성공이 실패라고 선언하십니다. 세속적인 성공은 자만하게 만들고 마음을 공허하게 만드는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기 때문입니다. 참행복의 역설을 마주한 제자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논리에 들어오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논리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기꺼이 도전을 무릅씁니다. 이는 때때로 힘들지만 언제나 기쁨을 동반하는 여정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에게서 오는 기쁨으로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첫마디가 ‘행복하여라’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합시다. 바로 이 행복한 사람들(beati)에서 참행복(beatitudine)이라는 명칭이 유래합니다. 참행복은 예수님의 제자와 동의어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중심주의의 노예살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심으로써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여시고,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녹여주시며, 종종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하는 참된 행복을 밝히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편견이나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분이십니다. 제자란 결국 예수님의 이끄심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 우리 각자는 – 기꺼이 제자가 되려고 하는가? 혹은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사람, 스스로 점잖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미 목표에 도달했다고 느끼는 사람의 완고함으로 행동하는가? 나는 참행복의 역설에 “내심 동요하도록” 내어 맡기는가, 아니면 내 생각의 테두리 안에만 머무르고 있는가? 더 나아가, 참행복의 논리로 고난과 시련을 넘어 예수님을 따르는 기쁨을 느끼는가? 이것이 제자의 결정적인 특징, 곧 마음의 기쁨입니다. 마음의 기쁨을 잊지 맙시다. 이것이 그 사람이 주님의 제자인지를 알 수 있는 시금석입니다. 곧, 그 사람의 마음속에 기쁨이 있는가? 내 마음속에 기쁨이 있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주님의 첫 제자이신 성모님께서 우리가 기쁨에 넘치고 마음이 열린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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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월 2022, 18:11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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