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복음이 ‘오늘’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 삶은 하느님으로 가득 찹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월 23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연중 제3주일)’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가치를 강조했다. 교황은 살아있고 힘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비추고 위로하며 우리의 일상사에서 질서를 잡아준다고 말했다. 또한 교회에서 시작된 시노드 여정을 인도하는 등대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교황은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말씀과 “친숙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하느님의 새로우심과 기쁨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전례의 복음에서 우리는 당신의 설교를 시작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루카 4,14-21 참조).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기도에 참여하십니다.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는데, 거기서 가난한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위로와 해방의 메시지(이사 61,1-2 참조)를 선포하는 메시아와 관련된 구절을 찾으셨습니다. 읽기를 마치시자,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루카 4,20)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이 ‘오늘(oggi)’에 관해 잠시 묵상해 봅시다. 루카 복음이 전한 예수님 설교의 첫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단어는 모든 시대를 거치며 항상 유효한 “오늘”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오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과 함께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리고 여러분이 말씀을 잘 새겨듣는다면, 여러분의 영혼에서 “오늘”이 시작됩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14절) 그 예언을 현재의 상태로 만드시며, 무엇보다도 그 예언을 완성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곧, 오늘입니다. 오래된 역사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편견으로 흐려진 이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분의 가르침이 다른 선생들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22절 참조). 예수님 안에 더 많은 것이 있음을 직감합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성령의 도유’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강론과 가르침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며 사람들의 영혼과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오늘’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의미를 가득 채우시는” 것이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나무랄 데 없는 강연이나 잘 다듬어진 연설을 듣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해 모든 것이 예전처럼 남아 있습니다. 많은 강론조차 추상적이고, 영혼을 깨우는 대신 잠들게 만듭니다. 저는 존경심을 갖고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신자들이 “이 강론이 언제 끝날까?” 하며 시계를 쳐다보기 시작할 때, 강론하는 이는 영혼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설교는 다음과 같은 위험에 빠집니다. 곧, 성령의 도유가 없는 설교는 하느님 말씀을 피폐하게 만들고 도덕주의나 추상적인 개념에 빠져듭니다. 또한 복음을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마치 시간 바깥에 있는 것처럼 제시합니다. 이런 설교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오늘의 힘’이 약동하지 않는 말씀은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고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설교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오늘’을 먼저 체험해야 다른 사람의 오늘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수업이나 강연을 하고 싶다면, 다른 곳에서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강론하는 자리에서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강론은 마음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번 ‘하느님의 말씀 주일’에 저는 마음을 일깨우는 말씀에 충실하고 “오늘”에 여전히 충실한 복음 선포자들과 설교자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오늘’을 살도록 이분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성령의 감미로운 힘이 성경을 살아있게 합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히브 4,12 참조),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일상사를 비추며, 위안을 주고, 질서를 잡아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어떠한 일상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오늘’로 바꾼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그러니 복음서를 집어들어 날마다 짤막한 구절을 읽고 다시 읽읍시다. 여행 중에 언제라도 차분히 복음을 읽을 수 있도록 복음서를 주머니나 가방에 넣고 다닙시다.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그 말씀이 특별히 우리를 위해, 우리의 삶을 위해 쓰여졌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더 평온하고 더 나은 전망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할 수 있게 도와줄 것입니다. 복음이 ‘오늘’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 삶은 하느님으로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전례력으로 올해는 주일에 자비의 복음인 루카 복음이 선포됩니다. 하루에 한 장씩 전체 본문을 직접 읽어보면 어떨까요? 하루에 한 장씩 말입니다. 복음에 친숙해지도록 합시다.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하느님의 새로우심과 기쁨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 곳곳에서 시작된 시노드 여정을 인도하는 등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식별하며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려 노력할 때 – 왜냐하면 경청이란 여론조사가 아니라 거기에 있는 말씀을 식별하는 것이기에 –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께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복음으로 길러질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 항구함을 주시길 빕니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23 1월 2022, 23:58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최근의 삼종기도와 부활 삼종기도

모두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