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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사십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를 그분께 말씀드립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월 2일 성탄 제2주일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주님과 내밀한 관계를 쌓아가도록 권고했다(바티칸 시국은 주님 공현 대축일을 1월 6일에 지낸다). 교황은 “구유 앞에서 예수님께 우리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리자”며, 저마다 가지고 있는 “내적 마구간”에서 그분께 우리의 문제를 말씀드리자고 말했다. 아울러 두려워하지 말라고 초대했다. “여러분의 마음이 악으로 너무 더럽혀졌거나 너무 흐트러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부디 여러분의 마음을 닫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전례의 복음은 우리가 늘 ‘삼종기도’를 통해 기도하는 아주 아름다운 구절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 구절은 그 자체로 성탄의 의미를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우리가 생각해보면 이 말은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현실을 함께 가지고 옵니다. 곧, ‘말씀’과 ‘살(사람)’입니다. “말씀(Verbo, Logos)”은 예수님께서 성부의 영원한 말씀, 항상 창조된 만물보다 먼저 존재하는 무한한 말씀이심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살(carne, sarx)”은 우리의 현실, 창조된 현실, 연약하고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죽을 운명에 처한 현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분리된 두 세계가 있었습니다. 곧, 땅과 반대되는 하늘, 유한에 반대되는 무한, 물질에 반대되는 영입니다. 요한 복음의 서문에는 또 다른 반대 명제, 또 다른 이항식(二項式)이 있습니다. 곧, ‘빛’과 ‘어둠’입니다(요한 1,5 참조).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어둠 속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빛이십니다. 빛과 어둠. 하느님께서는 빛이십니다. 그분 안에는 불투명한 것이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 안에는 어둠이 아주 많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빛과 어둠이 서로 만납니다. 거룩함과 잘못, 은총과 죄가 서로 만납니다. 예수님, 예수님의 육화는 바로 그 만남의 자리,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 은총과 죄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양극성을 통해 복음은 무엇을 선포하려 합니까? 엄청난 일을 선포하려 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행동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을 마주하신 주님께서는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복된 영원하심과 당신의 무한한 빛 안에 머물지 않으십니다. 가까이 다가오시어 사람이 되시고, 어둠 속으로 내려오시고, 당신께는 낯선 땅에서 사십니다. 왜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실까요? 왜 우리에게 내려오실까요? 우리가 당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영원으로부터 멀어지고, 빛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체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여기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곧, ‘우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합당하지 않다고 여길지라도, 그분께서는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오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거부할지라도, 그분께서는 지침 없이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을지라도, 그분께서는 어쨌든 오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면전에서 문을 닫을지라도, 그분께서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참으로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착한 목자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무엇일까요?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시려고 사람이 되시는 말씀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자리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문제 안으로, 우리의 비참 속으로 오십니다. 그분께서 거기로 오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종종 다른 이유로 하느님 앞에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거리를 둡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탄은 ‘그분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악으로 너무 더럽혀졌거나 너무 흐트러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부디 여러분의 마음을 닫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오십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가난 속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방문하시는 것과 여러분의 남루한 삶 속에서 사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셨다’라는 말씀이 뜻하는 바입니다. ‘산다’는 것은 오늘 복음이 이러한 현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동사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나눔, 엄청난 친밀감을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시고, 우리 ‘안에’ 살기를 원하시고,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저는 저에게, 여러분에게, 모두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그분께 자리를 내어드리려 하는가? 말로는 ‘예’라고 합니다. 그 누구도 “저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쩌면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만을 위한 건드릴 수 없는 삶의 영역이나 행여라도 복음이 들어올까 두려워하는 우리만의 내적 공간,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지 말았으면 하는 공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오늘 구체적인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내적인 것들이 과연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오시길 원치 않는 그 공간,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 그 공간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 각자 구체적으로 대답해 봅시다. “네, 네. 저는 예수님께서 오시길 바라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분께서 건드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안 됩니다. 저것은 (...)” 모든 사람은 저마다 죄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죄의 이름을 불러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에 대해 놀라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낫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죄를 보시도록, 적어도 하느님께 그 죄를 보여드립시다. 용기 내어 이렇게 말합시다. “주님, 저는 이런 상황에 처해 있지만, 아직 변화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저를 떠나시지 마소서.”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오늘만큼은 진심을 담아 이렇게 기도해 봅시다.

이 성탄시기 동안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어떻게요? 예를 들면 구유 앞에 멈춰 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유는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우리의 평범한 삶, 모든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많은 문제가 있는 곳에 사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 중에 우리가 잘못한 것도 있고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도 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거기로 오십니다. 우리는 거기서 열심히 일하는 목자들, 무고한 이들을 위협하는 헤로데, 엄청난 가난을 봅니다. (...) 하지만 이 모든 것 가운데, 수많은 문제 가운데, 심지어 우리의 문제 한가운데에서도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사시려는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사는 이야기를 말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니 구유 앞에서 예수님께 우리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립시다. ‘그분을 공식적으로’ 우리의 삶에 ‘초대합시다.’ 특별히 우리의 그늘진 영역에 말입니다. “주님, 보십시오. 거기엔 빛도 들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곳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아직 저는 이 상황을 떠나고 싶지 않으니까요.”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십시오. 우리는 저마다 그늘진 곳, “내적 마구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 두려움 없이 우리 시대의 사회 문제, 교회 문제, 심지어 가장 부끄러운 개인적인 문제들까지 말씀드립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구간에 사시길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자리인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더 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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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1월 2022, 11:49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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