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여성 가정폭력 “사탄과 같은 수준”
VATICAN NEWS / 번역 이창욱
“가정에서 심지어 남편에게까지 구타와 학대를 받는 여성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에게 이는 거의 사탄과 같은 수준의 문제입니다.”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12월 19일 주일 저녁 이탈리아 TV 방송 메디아셋(Mediaset)의 카메라 앞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invisibili)”을 대변하는 네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며 △폭력 △가난 △코로나19 대유행의 결과 △감옥에 갇힌 이들의 삶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뤘다. 바티칸 출입기자 파비오 마르케세 라고나(Fabio Marchese Ragona)가 기획한 이번 만남은 △가정폭력으로 일자리를 잃은 어머니 조반나 씨△노숙자 마리아 씨△코로나19 대유행으로 기뻐할 의지를 상실한 18세의 스카우트 소녀 마리스텔라 양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감옥에서 25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피에르도나토 씨가 참석했다. 조반나 씨가 존엄을 회복하는 방법을 묻자 교황은 가정폭력의 문제를 “거의 사탄과 같은 수준의 문제”로 정의하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 “굴욕적인 일입니다. 매우 굴욕적인 일이지요. 아빠나 엄마가 아이의 뺨을 때리는 것은 굴욕적인 일입니다. 매우 굴욕적입니다. 저는 항상 그렇게 말합니다. 절대 아이의 뺨을 때려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얼굴은 존엄하기 때문입니다. 자매님의 질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이기에 제가 다시 꺼내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존엄이 남아 있을까? 이 모든 것 다음에 나의 존엄은 무엇인가? 구타당하고 학대받는 여성의 존엄은 무엇인가? 성 베드로 대성전에 들어서서 오른편에 보이는 성모님의 피에타 상이 생각납니다. 모든 이들의 눈에 죄수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벌거벗은 아드님 앞에서 성모님은 굴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기르신 어머니입니다. 완전히 굴욕을 당하셨지만 성모님은 존엄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자매님이 굴욕을 당하고 존엄을 잃었다고 느낄 때처럼 역경의 순간에 이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성모님의 모습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 성모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용기의 모습을 간직하십시오.”
무관심의 문화
사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왜 그토록 잔인한지 묻는 마리아 씨에게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매님은 잔인함에 대해 말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사회가 여러분에게 가하는 가장 혹독한 모욕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무관심의 문화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제 문제들, 거주지 부재의 고통, 일자리 부족 등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더욱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돈을 빌려주는 이들이 문을 두드리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고리대금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고리대금업자들의 손에 넘어가 모든 것을 잃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기 때문이죠. 잔인함의 최고봉입니다. 저는 이런 고리대금이 사람들의 관심을 순수하지 않게 이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리대금은 문제의 탈출구가 아닙니다. 고리대금은 여러분을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할 뿐입니다.” 이어 교황은 그녀에게, 혹시 더 나쁜 상황에 처한 어떤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을 도와주라고 요청했다. 마리아 씨의 확답을 들은 교황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고통 속에 있을 때 고통의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항상 문제를 직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여러분보다 더 나쁜 상황에 있고 여러분의 눈길이 필요한 다른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도록 그를 도와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갇힌 이들 가까이에 계십니다
피에르도나토 씨는 변화를 바라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는지 교황에게 물었다. 교황은 성경 구절로 대답했다. “희망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로마 5,5 참조). 이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오페라가 있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말합니다. 희망에 관해 오페라 투란도트에서는 희망이 항상 실망시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형제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우주 궤도에, 저 멀리 계시는 게 아니라, 형제님 가까이에 계십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가까이 다가감, 연민(가엾이 여기는 마음), 온유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감옥에 갇힌 이들 각자와 함께 계시고, 어려움을 겪는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 (...) 비록 형제님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형제님이 이미 용서를 받았고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이런 까닭에 저는 형제님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용서하십니다. (...) 우리의 힘은 가까이 계시고, 가엾이 여기시며, 온유한 사랑, 엄마처럼 포근한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희망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님은 그런 희망을 품고 계신 겁니다. 형제님의 증언에 감사드립니다.”
대면해야 합니다
마리스텔라 양은 코로나19가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를 다루며 만남과 경험으로 구성된 건강한 관계를 어떻게 맺을 수 있는지 물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봉쇄기간 동안에는 자매님에게 친구들과의 만남, 가족과의 접촉이 부족했습니다. 외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어쩌면 학교도 문을 닫았기 때문이죠. 우리는 만남이 필요합니다. 대면 만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고립시키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휴대폰으로만 연락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휴대폰의 우정일 뿐입니다. 구체적인 대화가 부족합니다. 자매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대화가 온라인 대화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무엇인가 더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항상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청소년들의 습관과 관련해 교황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휴대폰을 사용하고 싶으면 사용하십시오. 하지만 이런 행동이 여러분을 사람들과의 만남, 직접적인 만남, 함께 학교에 가거나, 산책하러 가거나, 함께 커피를 마시러 가는 만남, 가상적인 접촉이 아니라 실제적인 만남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적인 만남을 한쪽으로 제쳐둔다면 우리 역시 액체나 기체처럼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며, 더불어 살지 못하고 항상 온라인으로만 존재하는, 온유한 사랑이 결핍된 온라인 인간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기, 갈등, 희망
조반나 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코로나19 대유행의 결과로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한 다음 어떻게 희망을 품을 수 있는지 물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코로나19는 우리 모두를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고통스럽습니다. 많은 경우 삶을 끝내게 할 정도로 쓰라립니다. 위기와 더불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 위기는 진행 중입니다. 갈등은 자매님의 마음을 닫게 하고 계속 싸움을 벌입니다. 자매님은 그 갈등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보지 못합니다. 저는 자매님이 위기에서 잘 벗어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자매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대단합니다. 자매님은 저항의 교훈, 재난에 대한 저항의 교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 자매님은 삶을 위해, 계속되는 삶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진합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매님은 집도 없고 일자리도 없으며 따라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매님은 앞을 바라보고 있고, 이전보다 더 잘 벗어나고 있지만 혼자 힘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매님은 누군가를 찾아야 합니다. 자매님을 동반해줄 사람들을 찾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열린 마음
가난한 이들에게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도록 하려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 마리아 씨에게 교황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자매님이 가난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때, 자매님의 마음이 변합니다. ‘가난한 이의 성사’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성사적’이라고 말합시다. (...) 가난한 사람의 눈길이 자매님을 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쓰고 버리는 문화는 단지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한 가정에서 노인들을 소외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버리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 고령에 이르면 여러분은 자동적으로 요양원을 찾습니다. 휴식이 아니라 위탁을 위한 집이죠. 여러분의 연로한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탁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의 무자비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바깥에 내다버립니다. 이런 일은 때때로 인생의 초기 단계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아이가 태어나면 이렇게 말합니다. ‘아, 안 돼요. 우리에게 부담이 되니 아이를 입양시설에 보냅시다.’ 이처럼 사회가 병들 때 가난한 이들을 버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문제와 싸워야 합니다.”
교도소 과밀현상
피에르도나토 씨는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더욱 외로움에 시달리는 재소자들의 상처를 어떻게 봉합할지 물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감염병의 전 세계적 확산이 이렇게 만듭니다. 여러분을 홀로 내버려 둡니다. (...) 교도소 과밀현상에 대해서는, 과밀화는 분명 하나의 장벽입니다.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저지른 범죄에 대한 모든 유죄 판결에도 희망을 줘야 합니다. 창문이 있어야 합니다. 창문 없는 교도소는 좋지 않습니다. 하나의 벽일 뿐입니다. 창문 없는 감방은 좋지 않습니다. 여기서 창문이란 반드시 물리적인 창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실존적인 창문, 영적인 창문입니다. ‘나는 내가 나갈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교회는 사형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에는 창문이 없고, 희망도 없고, 생명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이어 교황은 목공일을 하던 어느 비신자 재소자의 체험을 들려줬다. 어떤 방문자가 그에게 복음을 읽으라고 권했다. “그는 복음서를 받았고 몇 구절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마음속에 무엇인가 생겼습니다. 제 앞에 있던 벽이 무너졌습니다. 앞이 열렸습니다.’ 그는 훌륭한 목수였기에 이런 것을 만들었습니다. [교황은 그 죄수가 나무로 만든 조각상을 보여준다.]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예수님을 알았을 때부터 겪은 제 체험입니다.’ 이 조각상은 예수님과 함께할 때 벽이 무너지고 생명의 창문이 있다는 것을 본 한 재소자가 만든 것입니다.”
시험을 받는 하느님과의 관계
마리스텔라 양은 자기 나이에 어떻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고 또 그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지 물었다. “봉쇄시기에는 모든 것이 시험대에 오릅니다. 심지어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 하느님과의 관계는 항상 좋기만 한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가정 안에서 모든 사랑의 관계가 그렇듯 위기도 있지요. (...) 복음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다른 경우도 정리하게 해 줍니다. 저는 위기에 빠진 삶을 그저 말, 말, 말로만 고치기를 원하는 설교가들이 두렵습니다. 위기에 빠진 삶은 가까이 다가감, 연민(가엾이 여기는 마음), 온유한 사랑으로 치유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자매님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약간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신부님, 하느님께 화를 내는 것이 죄일까요? 주님, 저는 당신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죄인가요?’라고 제게 말한다면, 저는 그것도 기도의 한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아빠나 엄마에게 화를 냅니다. 아이들은 더 많은 관심을 바라기 때문에 부모에게 화를 냅니다. 만일 자매님이 하느님께 화를 내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 앞에서 자녀의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아빠나 엄마에게 화를 내는 것은 좋지 않지만, 아빠나 엄마가 자매님을 매우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이런저런 일이 잘 되지 않아 자매님이 하느님께 화를 내지만, 하느님께서 자매님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자매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빠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지 아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놀라지 않으십니다. 자매님에게 다가오는 모든 느낌을 주님께 말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복음서를 손에 쥐고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십시오.”
교황의 축하
교황은 방송을 마무리하며 TV 시청자들에게 직접 다음과 같이 물었다. “여러분은 성탄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는 이런저런 것을 사러 나가야 하는데 (...)’ 좋습니다. 하지만 성탄이 무엇인가요? (성탄) 나무인가요? 한 여성과 한 남성이 함께 있는 한 아기의 조각상인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잠시 멈추고 성탄을 평화의 메시지로 생각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에게 예수님과 함께하는 성탄, 참된 성탄을 축하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축제를 지낼 수 없다는 걸까요? 아닙니다. 축제를 지내십시오. 모든 것을 맘껏 드십시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그렇게 하십시오. 다시 말해 마음의 평화와 함께 말입니다. 제 말씀을 경청해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기쁜 성탄을 축하합니다. 축제를 지내십시오. 선물을 주되 예수님을 잊지 마십시오. 성탄은 오시는 예수님, 여러분의 마음을 건드리시는 예수님, 여러분의 가족을 감동시키러 오시는 예수님, 여러분의 집, 여러분의 마음속, 여러분의 삶에 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은 쉽습니다. 주님께서는 매우 공손하시지만, 그분을 잊지 마십시오. 모두에게 성탄을 축하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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