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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강론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들 앞에서 희망을 일궈야 합니다”

약한 이들 앞에서 고개를 돌리지 말고 사회정치적으로 참여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월 14일 연중 제33주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한 제5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위한 미사를 통해 선의 회심자가 되라고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했다.

번역 이창욱

오늘 복음의 첫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이미지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라고 말합니다(마르 13,24-25 참조). 하지만 곧이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열어 주십니다. 바로 그 완전한 어둠의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르 13,26 참조).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되는 것처럼(마르 13,28 참조), 지금도 우리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을 관상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 말씀은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며 역사를 읽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곧, ‘오늘의 고통’과 ‘내일의 희망’입니다. 한편으로는 각 시대마다 인간의 현실이 처한 온갖 고통스러운 모순이 떠오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하는 구원의 미래, 다시 말해 우리를 모든 악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시는 주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길로 이 두 가지 측면을 살펴봅시다.

첫 번째 측면은 ‘오늘의 고통’입니다. 우리는 시련, 폭력, 고통, 불의로 점철된 역사의 일부이며, 결코 도래하지 않을 것 같은 해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상처받고 억압받으며 때때로 짓밟히는 이들은 바로 가난한 이들, 사슬에서 가장 약한 고리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지내고 있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곳으로 몸을 돌리지 말고, 가장 약한 이들의 고통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들과 매우 관련이 있습니다. 곧, 그들의 삶의 태양은 종종 고독으로 어두워지고, 그들이 고대하던 달은 빛을 잃었습니다. 그들이 꿈꾸던 별들은 체념 속으로 떨어졌고, 그들의 실존 자체가 뒤흔들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가난한 이들을 보지도 않은 채 빠르게 내달리며 그들의 운명을 주저없이 저버리는, 쓰고 버리는 사회의 불의와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종종 강요받는 가난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 번째 측면이 있습니다. 곧, ‘내일의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고통 앞에서 두려움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려고 우리의 마음을 희망으로 열어주려 하십니다. 이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해가 어두워지고 모든 것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이 순간, 그분께서 가까이 다가오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스러운 역사의 신음 속에 구원의 미래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내일의 희망은 오늘의 고통 속에서 꽃을 피웁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저세상의 약속일 뿐 아니라, 이미 우리의 상처입은 역사 안에서 – 우리 모두는 병든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자라고 있으며, 세상의 불의와 압제 가운데에서도 나아가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한가운데에서 하느님 나라는 나무의 여린 잎처럼 돋아나 역사를 그 목표로 인도합니다. 우리를 결정적으로 해방시켜주실 우주의 임금, 주님과의 최후의 만남 말입니다.

이 시점에서 다음과 같이 자문해 봅시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 요구되는가? ‘오늘의 고통을 치유하여 내일의 희망을 키우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오늘의 고통을 치유하면서 전진하지 않는다면, 내일의 희망을 품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실 복음에서 생기는 희망은 내일의 상황이 더 나아지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지만 – ,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을 오늘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 날마다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복된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것을 사춘기의 낙관주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상황이 바뀌기만을 바라고 그 전에는 자기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가는 철부지의 낙관주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사랑의 나라, 정의와 형제애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씨앗은, 예를 들면 강도들에게 상처를 입은 사람 앞을 지나가 버린 사제와 레위인이 뿌린 것이 아닙니다. 한 이방인, 멈추어 서서 행동을 취한 사마리아인이 희망의 씨앗을 뿌렸습니다(루카 10,30-35 참조). 오늘 교회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멈추어 서서 가난 안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십시오.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 희망을 심으십시오.” 그 사람의 희망, 여러분의 희망, 그리고 교회의 희망입니다. 매일 세상의 폐허 속에서 지칠 줄 모르는 희망의 건설자들이 되고, 해가 어두워지면 빛이 되고, 무관심이 만연한 가운데에서 연민의 증거자가 되고, 점점 더 무관심이 만연해지는 가운데 주변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는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바입니다. 연민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선한 일을 하겠지만, 그리스도인의 방식으로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 연민입니다. 가까이 다가가고, 가엾이 여기고, 온유한 사랑의 몸짓을 행합시다. 하느님의 세 가지 방식은 가까이 다가감, 연민, 온유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가난한 이들과 가까운 어떤 주교님이 되뇌던 말씀이 제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분 역시 마음이 가난하셨던, 고(故) 토니노 벨로(Tonino Bello) 주교님입니다. “우리는 희망하는 데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일궈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희망이 관심, 정의, 연대, 공동의 집(지구)의 돌봄이라는 선택과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면,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낼 수 없을 것이고, 그들을 사회의 주변부에서 살도록 강요하는 쓰고 버리는 경제도 바뀌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기대는 새롭게 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을 일구는 것’은 우리에게,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토니노 벨로 주교님의 이 아름다운 표현인 희망을 일구는 것을 날마다 구체적인 삶에서, 인간관계에서, 사회 정치적 의무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저로 하여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선활동을 통해 행하는 일, 교황자선소의 활동을 생각하게 합니다. (...) 그들이 거기서 무엇을 합니까? 희망을 일굽니다. 돈을 주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희망을 일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교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역동성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순하지만 웅변적인 희망의 이미지를 제시하십니다. 곧,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가리키는, 조용히 돋아나는 무화과나무의 잎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뭇가지가 부드러워질 때 잎이 돋아난다고 강조하십니다(마르 13,28 참조). 형제자매 여러분, 이 말씀은 세상의 희망이 돋아나고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곧, ‘온유한 사랑’입니다. 연민은 여러분을 온유한 사랑으로 이끕니다. 닫힌 마음, 내적 엄격성을 극복하는 것도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완전히 질서정연하고 모든 것이 엄격해지기를 바라는 “종교 복고주의(restaurationism)”의 유혹입니다. 이런 것은 성령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엄격성 속에서 희망을 꽃피우기 위해 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비극 앞에서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유연해지고, 그저 우리 자신의 문제들만 걱정하는 유혹도 극복해야 합니다. 나무의 여린 잎사귀처럼, 우리는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오염을 빨아들이고 그것을 선으로 변화시키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각종 현안에 대해 말하고, 논쟁하고, 분개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할 줄 압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뭇잎들을 본받는 것입니다. 눈에 띄지 않지만 매일 더러운 공기를 깨끗한 공기로 바꾸는 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선의 회심자들”이 되길 원하십니다. 곧,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무거운 공기로 호흡하지만,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사람입니다(로마 12,21 참조). 이런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행동합니다. 굶주린 이들과 함께 빵을 쪼개 나누고, 정의를 위해 일하고, 가난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며, 그들의 존엄을 회복시킵니다. 사마리아인이 행한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바깥으로 나가고,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루카 4,18 참조) 교회는 아름답고, 복음적이며, 젊은 교회입니다. 저는 이 마지막 형용사에 잠시 머물고 싶습니다.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교회는 젊습니다. 이런 교회는 실의에 빠진 이들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통해 이렇게 말하는 예언자적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에게도 잎이 돋아나는 여름이 한겨울에서도 태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에서도 희망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러한 희망의 전망을 세상에 전합시다. 가난한 이들에게 온유한 사랑으로, 가까이 다가감으로,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판단하지 말고 – 우리는 심판을 받습니다만 – , 희망을 전합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그들 곁에, 가난한 이들 곁에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그들 안에’,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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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1월 2021,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