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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잔틴 전례 “마음속에 십자가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9월 14일 슬로바키아 프레쇼우에서 비잔틴 전례에 따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신성한 성찬 예배’를 거행하면서 승리주의적 그리스도교를 바라지 말라고 권고했다. 아울러 십자가가 없으면 그리스도교는 세속적이고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슬로바키아에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상기했다.

Debora Donnini / 번역 김호열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은 십자가를 “정치적 상징”이나 “종교적·사회적 지위의 표시”로 축소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고뇌, 어둠, 버림받음, 자신의 비참, 실수의 스캔들 속에서도 당신을 만날 수 없을 만큼” 절망하는 사람이 없도록 “가장 어려운 길”인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다고 말했다. 라틴 전례 및 비잔틴 전례를 거행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수세기 동안 살고 있는 슬로바키아 동부 지역의 중심인 프레쇼우에서, 교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심오한 의미를 바탕으로 신자들에게 강한 어조로 강론했다. 교황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많은 사람과 신자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언급했다. 교황의 강한 어조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 비잔틴 전례에 따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신성한 성찬 예배’에 참례하기 위해 슬로바키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프레쇼우의 메스트스카 스포토바 할라 광장에 모인 슬로바키아 신자들을 향해 울려 퍼졌다. 프레쇼우는 ‘광석산’ 기슭에 위치한 도시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지난 1995년 비잔틴 전례 가톨릭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기념판이 세워져 있다.

교황을 태운 교황 전용차(papamobile)가 지나갈 때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는 3만 명 이상의 참석자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전례는 슬로바키아에서 최초로 교황이 주례하는 비잔틴 전례에 따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신성한 성찬 예배’였다. 전례는 “팔레오슬라브어(paleoslavo)”라 불리는 ‘고대 교회 슬라브어(전례용 언어)’로 거행됐으며 부분적으로 슬로바키아어도 사용됐다. 동부 슬로바키아는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지역이기 때문에 전례 중 일부 기도는 루테니아어, 우크라이나어, 헝가리어, 그리고 롬족의 언어인 롬어로 바쳐졌다. ‘신성한 성찬 예배’는 특별한 촛대 트리케리온(trikerion)과 디케리온(dikerion)으로 축복하는 풍성한 표징으로 가득했다. 테트라포디온(tetrapodion) 위에 놓인 ‘성 십자가’에 대한 경배의 순간도 인상 깊었다. ‘신성한 성찬 예배’ 말미에 교황은 ‘클로코초브의 천주의 성모 마리아’* 이콘 사본을 선물로 받았다. 

*역주: 슬로바키아에서는 ‘클로코초브의 천주의 성모 마리아 이콘’이 유명하다. 슬로바키아의 작은 마을 클로코초브에서 1670년 헝가리 군이 클로코초브 성당을 습격했을 때, 성모 마리아의 이콘에서 눈물이 흐르는 일이 일어났다. 35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클로코초브의 천주의 성모 마리아 이콘의 기적의 눈물’은 슬로바키아 사람들의 신앙 속에 깊이 간직돼 있다.

‘신성한 성찬 예배’를 거행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신성한 성찬 예배’를 거행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십자가의 증거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생명을 주는 것 

교황은 십자가는 “높이 매달기 위한 깃발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의 순수한 원천”, 곧 참행복(Beatitudini)의 순수한 원천이라고 상기하면서, “오늘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떨리는 침묵 속에서 우리 모두와 여러분 각자와 저에게 ‘너는 나의 증인이 되고 싶으냐?’고 묻고 계신다”고 말했다. 

“단지 목에 십자가를 걸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음속에 십자가를 간직하고 있는 증인은 그 누구도 원수로 보지 않고,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내어주신 형제자매로 바라봅니다. 십자가의 증인은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으며 현재에 대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증인은 속임수와 세상의 권력의 길을 가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것을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칭찬 받으려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중성의 종교가 됩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증인은 오직 하나의 전략, 곧 스승의 전략을 따릅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한 사랑의 전략입니다.”

일상의 영웅들

교황은 십자가의 증인들이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변화되고, 지상에서의 승리를 기대하지 않으며, 일상생활에서 열매를 맺는다고 말했다. 아울러 “모두 침묵하고, 숨어 지내고, 신앙을 고백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던 매우 어려운 시기에 이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기억했다.

“이곳 슬로바키아에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너그러운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었는지요! 자신들이 오랫동안 관상해 왔던 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증거입니다. 그들은 죽는 것까지도 예수님을 닮기에 충분했습니다. 저는 증거할 기회가 부족하지 않은 우리 시대도 생각합니다. 이곳엔 하느님 덕분에 세계의 다른 많은 지역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세속적인 것과 안일함으로 더럽혀질 수 있습니다. 반면 십자가는 순수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교황은 슬로바키아인들에게 “끝까지 사랑함으로써 목숨을 바친”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해 주길 요청했다. 이어 그들을 가리켜 역사를 바꾼 삶을 살아낸 “우리의 영웅들”이자 “일상의 영웅들”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실제로 증거자들에게서 다른 증거자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처럼 믿음은 “세상의 힘이 아니라 십자가의 지혜로, 조직이 아니라 증거”로 널리 퍼진다고 덧붙였다.  

십자가가 “읽지 않은” 책으로 남아 있어선 안 됩니다

몇몇 성인들은 십자가가 책과 같다고 가르쳤다. 교황은 책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펼쳐서 읽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책을 구입하고 대충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십자가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우리 교회의 구석구석에 십자가가 그려지거나 조각되어 있습니다. 우리 목에 걸려 있거나, 집 안, 자동차 내부, 주머니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바라보기 위해 멈춰 서서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열지 않거나,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그분의 상처에 놀라지 않거나, 우리를 위해 상처 입은 사랑의 하느님 앞에서 감동받아 마음이 부풀어 오르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는다면, 십자가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는 읽지 않은 책으로 남을 것입니다. 책 제목과 저자는 잘 알겠지만 우리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경배해야 하는 물건으로, 정치적 상징으로, 종교적·사회적 지위의 표시로 축소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교는 열매 맺지 못합니다

교황은 이날 전례의 복음을 언급하면서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보고 증거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요한 사도가 십자가 위에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죄 없으신 예수님을 봤다고 설명했다. 교황은 세상의 눈에 십자가는 실패로 보였다면서, 우리에게도 “십자가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첫 인상”에 멈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을 몸소 짊어지시며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말로만 나약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사실은 강하고 승리하는 신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는 엄청난 유혹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의미 있고 중요하고 영광과 영예를 받는 승리자의 그리스도교, 승리주의적 그리스도교를 갈망하고 있는지요. 하지만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교는 세속적이며 열매 맺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버림받음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교황은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보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어주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라고 권고했다. 이어 예수님께서 “절망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몸소 절망을 맛보셨고, 우리의 가장 쓰라린 절망을 당신 것으로 삼으시려고 십자가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하고 부르짖으셨다”고 말했다. 교황은 이것이 “구원하는 부르짖음”이라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버림받음까지도 당신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절대로요.” 

신자들에게 성체와 성혈의 양형 영성체를 나눠주기 위해 2만5000개의 숟가락을 사용한 ‘신성한 성찬 예배’를 마치면서 비잔틴 전례 가톨릭 교회 프레쇼우 관구장좌 대교구장 얀 바브야크(Ján Babjak) 대주교가 교황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얀 대주교는 교황의 방문에 대한 모든 신자들의 기쁨을 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슬로바키아의 그리스-가톨릭 교회에서 ‘로마의 베드로’는 수세기 내내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우리는 교황님을 위해, 그리고 형제자매들을 믿음 안에서 굳건하게 하며 전 세계를 순방하시는 교황님의 사도 활동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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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9월 2021, 1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