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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특별 희년 일정 가운데 하나인 청소년을 위한 희년의 날 행사 중 성 베드로 광장에서 한 청소년의 고해를 듣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 (2016년 4월 23일) 자비의 특별 희년 일정 가운데 하나인 청소년을 위한 희년의 날 행사 중 성 베드로 광장에서 한 청소년의 고해를 듣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 (2016년 4월 23일)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오는 2022년 제56차 홍보 주일 교황 담화의 주제 ‘경청하기’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 재위 기간 동안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귀 담아 듣는 데서 “마음의 회심”이 나온다. 이는 특히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극적인 시기에 교황이 우리에게 누차 촉구한 내용이기도 하다.

Alessandro Gisotti / 번역 김호열 신부

“코로나19 대유행은 하나의 위기입니다. 우리는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예전과 동일하게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예전보다 더 나아지든지 혹은 더 나빠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년 반 동안 수차례에 걸쳐 이 같이 강조했다. 이 언급은 코로나19 대유행의 위기에서 벗어나거나 적어도 가장 심각한 단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 나라마다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우리가 고군분투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큰 효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그러므로 유례없는 시련에서 인류를 하나로 묶은 이 극적인 시기에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이제 스스로 물어야 한다. 교황이 제기한 중대한 질문을 다시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를 더 취약해지게 하고 서로가 서로를 더 필요로 하게 만든 코로나19가 우리의 숱한 “안보”를 무너뜨리기 이전보다 우리가 ‘더 나아졌는지 아니면 더 나빠졌는지’ 자문해야 한다. 더 나아지거나 더 나빠지는 문제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아무런 윤리적 의미가 없다. 그것은 마음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영향을 미친다. 사실 우리가 형제애의 발전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복음에 대한 충실성의 성장을 진정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교황이 굳건하고도 명료하게 우리에게 보여준 바와 같이 “마음의 회심”에서다. 마음의 회심은 정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움직임, 사전에 정해진 도착지가 존재하지 않는 여정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관계의 반영이고 진정한 마음의 회심은 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정에도 출발점은 존재한다. 곧, 경청(ascolto, 듣기)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으로 선출된 후 선거인 추기경단과 함께 지난 2013년 3월 14일 봉헌한 첫 미사에서 우리가 배웠던 것처럼, 경청하기(ascoltare, 듣다)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교황의 세속명)에게 믿음이란 당시 강론에서 세 가지 동사 – ‘짓다(edificare)’, ‘고백하다(confessare)’, ‘걸어가다(camminare)’ – 를 통해 드러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더욱 뿌리를 두고 있고, 그 뿌리가 확고할수록 이웃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움직임과 행동이 더욱 굳건해지는 것이다. 

9월 29일 발표된 바와 같이 교황은 내년 홍보 주일의 주제이자 정보를 다루는 이들의 소명을 가리키며 정확히 ‘경청하기’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귀 담아 듣는 일은 고된 작업이다. 왜냐하면 우리 언론인들은 트위터에 올라온 색다른 표현이나 토론회를 종합하는 말처럼 사실상 결론만 알면 된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황은 우리 언론인들이 경청하고 겸손을 실천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교황은 2021년 홍보 주일 교황 담화를 통해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으니’ ‘와서 보시오’라고 초대했다. 아울러 언론인들에게 “신발이 닳도록 발로 뛰어” 사람들과 이야기를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만나 보도하라고 촉구했다. 귀 기울이는 일은 언론인의 나침반이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재위 기간 내내 ‘귀의 사도직(apostolato dell’orecchio)’이라는 표현을 만들어 내기까지 ‘경청’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걸었다. 교황은 ‘경청치료(ascolto-terapia)’를 통해 곤경에 빠진 동료들을 도울 수 있도록 젊은이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아울러 교황은 목자들이 하느님 백성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요청했다. 그래야만 목자들이 하느님 백성을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인도할 수 있고, 그래야만 교회가 진정으로 공동합의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황은 성 학대 희생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요청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만 치유와 화해라는 견고한 길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황은 지난 9월 5일 삼종기도 훈화에서 이 같이 말하며 “수많은 할 말과 할 일에 도취되어 서두르는 바람에 우리는 우리에게 말하는 이의 말을 들을 시간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경청하기”는 새로 태어남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그때 코로나19는 죽음과 불안의 씨앗을 뿌리기를 멈출 것이다. 결국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명으로 정한 아시시의 가난뱅이(Poverello) 성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했던 말을 오늘 다시 우리에게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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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9월 2021, 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