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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노델그라파에서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리아 크리스티나 첼라 모첼린. 셋째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악성종양이 발견됐다. 바사노델그라파에서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리아 크리스티나 첼라 모첼린. 셋째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악성종양이 발견됐다. 

교황, 새 가경자 3명 선포… 세 자녀 둔 젊은 어머니도 포함

지난 2001년 복자품에 오른 부부의 딸 엔리카 벨트라메 콰트로키, 게슈타포의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작은 형제회의 플라치도 코르테세 신부, 치니셀로 발사모의 젊은 어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 첼라 모첼린 등 하느님의 종들이 영웅적 성덕을 인정받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경자 선포에 관한 교령을 8월 30일 인준했다.

Benedetta Capelli / 번역 이창욱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기,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 하느님의 용서를 바라는 희망. 이는 새 가경자로 선포된 3명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8월 30일 교황청 시성성 장관 마르첼로 세메라로(Marcello Semeraro) 추기경의 예방을 받은 후, 교황청 시성성이 △엔리카 벨트라메 콰트로키(Enrica Beltrame Quattrocchi) △플라치도 코르테세(Placido Cortese) 수사신부 △마리아 크리스티나 첼라 모첼린(Maria Cristina Cella Mocellin)의 영웅적 성덕에 관한 교령을 인준했다. 

“리카르도, 우리를 위한 선물”

한 젊은 어머니의 이야기는 의사로서 많은 봉사를 했고 임신 상태에서 자궁에 종양이 자라고 있음을 알았지만 인공유산 대신 아기의 생명을 택했던 성녀 잔나 베레타 몰라(Gianna Beretta Molla)와 아기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키아라 코르벨라 페트릴로(Chiara Corbella Petrillo)의 사례를 떠올린다. 1969년 8월 18일 밀라노 주의 치니셀로 발사모에서 태어난 마리아 크리스티나 첼라 모첼린의 생애는 짧지만 매우 풍요로웠다. 본당 생활에 적극적인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살레시오 수녀회(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에서 성소식별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다 16세에 카를로와 만나면서 혼인성소를 느꼈다. 왼쪽 다리에 육종이 발견된 지 2년 후 그녀는 치료를 받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91년 카를로와 혼인했다. 부부는 슬하에 2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셋째 아들을 임신한 사실을 알자마자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병이 재발했다.

그녀의 선택은 임신을 유지하고 아기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치료를 받는 것이었다. 그녀는 편지에서 셋째 아들 라카르도에게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들려줬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너를 포기하지 않으려 애썼단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도 모든 것을 이미 깨닫고 더 이상 다른 반대를 하지 않으셨지. 리카르도, 너는 우리를 위한 선물이야. 바로 그날 저녁,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차 안에서 첫 태동을 느꼈단다. 마치 내게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엄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너를 원치 않을 수 있었겠니? 너는 소중한 존재란다. 너를 바라보면 정말 예쁘고 생기있고 좋았지. 그래서 이 세상에서 아들을 위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없다고 생각해.”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26세에 세상을 떠났다. 성부의 사랑을 확신했고,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께 충실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가정

로마에서 세상을 떠난 지 9년이 지난 지금, 교회는 복자 루이지 벨트라메 콰트로키와 복녀 마리아 코르시니의 막내 딸인 엔리카 벨트라메 콰트로키의 영웅적인 성덕을 인정했다. 엔리카 벨트라메 콰트로키는 98세에 세상을 떠났다. 지난 2001년 벨트라메 콰트로키 부부를 복자품에 올렸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덕의 여정을 걷는 가정은 가능하고, 아름다우며, 탁월한 결실”이라며 “가족, 교회, 사회의 선익을 위해 근본적”이라고 말했다. 

엔리카는 자신의 형제자매인 타르치시오 신부, 체칠리아 수녀, 파올리노 신부의 발자취를 따르려 했지만, 그녀의 운명은 연로한 부모를 모시는 부르심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로마의 가장 취약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의 자원봉사자로 헌신했으며, 평신도 사도직 단체 ‘가톨릭 액션(Azione Cattolica)’에서 어머니와 함께 활동하며 가르치는 일에도 전념했다. 엔리카는 1976년부터 이탈리아 문화유산활동관광부(문화부)의 감독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녀의 삶은 각종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점철됐지만, 특별히 기도와 매일 미사 참례를 특징으로 한다. 생애 마지막 시기에는 위기에 빠진 부부들을 돕는 일에 헌신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녀의 삶의 이유였다.

부부 복자 루이지와 마리아의 딸 엔리카 벨트라메 콰트로키
부부 복자 루이지와 마리아의 딸 엔리카 벨트라메 콰트로키

사랑과 말씀의 사람

작은 형제회의 플라치도 코르테세 신부의 특징은 완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역량이다. 그는 인내심 많고, 단순하며,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를 특징짓는 상황처럼 어려운 상황들을 맡을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1907년 3월 7일 츠레스(오늘날 크로아티아에 위치)에서 태어나 1930년 사제품을 받고 파도바 소재 성 안토니오 대성당에서 사목봉사를 했다. 몇 년 뒤 잡지 「일 메사제로 디 산 안토니오」(Il Messaggero di Sant’Antonio)의 편집장이 됐다.

플라치도 코르테세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주 이탈리아 교황대사 프란치스코 보르곤지니 두카(Francesco Borgongini Duca) 주교(1953년 추기경 서임)의 위탁을 받아 이탈리아 강제수용소, 특히 파도바 인근에 위치한 키에사누오바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크로아티아인들과 슬로베니아인들을 도왔다. 그는 1943년의 휴전 이후 연합군 포로들과 유다인들을 포함해 나치의 박해를 받던 사람들이 용이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지치지 않고 노력했다. 독일인들은 이러한 그의 우호적인 태도를 정치활동으로 간주하고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1944년 10월 8일, 그는 교묘한 계략으로 치외법권 지역인 성 안토니오 대성당의 바깥으로 끌려가 트리에스테의 나치 친위대(SS)수용소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다 숨을 거뒀다.

나치-파시즘의 박해에서 사람들을 구하다 1944년 피살된 플라치도 코르테세 신부
나치-파시즘의 박해에서 사람들을 구하다 1944년 피살된 플라치도 코르테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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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8월 2021, 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