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입구를 통과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2016년 7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입구를 통과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2016년 7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고통의 심연 속에서 교황이 보여준 그날의 침묵

프란치스코 교황은 5년 전 세계청년대회가 열리는 폴란드를 방문했다. 교황은 이 사도적 순방의 일정 가운데 나치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찾았다. 약 2시간에 걸쳐 죽음과 학살이 자행된 공간을 돌아보는 동안, 교황은 완전한 침묵을 유지했다. 교황은 대학살의 공포와 마주하면서 오직 상징적 행동으로 당시의 고통과 소통했다.

Salvatore Cernuzio / 번역 이재협 신부

“주님, 당신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그처럼 많은 잔혹한 행위를 용서하소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를 방문한지 5년이 지난 지금, 교황이 스페인어로 작성한 방명록의 몇 글자만이 이 장소에 남아있다. 과거의 공포와 고통의 분위기는 여전히 이곳 강제수용소를 감싸고 있다. 크라쿠프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를 위해 폴란드를 방문한 전 세계 젊은이들의 음악과 축제 분위기 속에서 교황은 2016년 7월 29일 나치 대학살이 벌어진 장소에서 완전한 침묵의 시간을 보내려 했다. 이날은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이 사상 처음으로, 어쩌면 지금까지 유일하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순간일 것이다.

강제수용소 방명록에 남긴 교황의 글
강제수용소 방명록에 남긴 교황의 글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가 갇혔던 감방에서의 기도

사실 그날, 수용자들을 총살한 벽 옆에서 작은 의자에 앉아 홀로 기도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곳에는 여전히 후두부에 총을 맞고 죽은 수용자들의 피로 물든 옷가지를 볼 수 있다. 이어 교황은 소위 ‘아사 감방’이라 불린 18호 감방의 어둠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담은 시선으로 방을 둘러보며 15분간 머물렀다. 이 감방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가 수감됐던 방이다. 콜베 신부는 수용소 11구역에서 지목된 열 명의 희생자 중 한 가정의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나치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침묵 속에 울려 퍼지는 메시지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방문한 교황은 약 2시간의 방문 내내 완전한 침묵을 지켰다. 세상을 향해 외치는 방법으로 교황이 침묵을 택한 것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 안에서 홀로코스트로 기억되는 그 잔혹함의 심연을 낳은 사악한 논리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근 벨라루스 태생의 폴란드 여성 리디아 막시모비치를 만났을 때도 교황은 침묵했다. 교황은 그녀와 만난 순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그녀의 팔뚝에 새겨진 수감 번호에 입을 맞추는 행위로 그녀와 소통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명록을 작성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명록을 작성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무죄한 이들을 기억하는 성금요일

5년 전인 7월 29일 오전, 교황은 그 죽음과 박해의 장소에 머물면서 많은 상징적 행동을 보여줬다. 교황은 이날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뒤 소아병동을 찾았으며, 세계청년대회에 참석한 청년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마치 성금요일과 같았던 당시 금요일, 교황은 비록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골고타 언덕으로 걸어 올라간 모든 무죄한 이들의 외침이 교황의 침묵을 통해 울려 퍼졌다.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지적으로 치르고 있는 일종의 제3차 세계대전” 속에서 골고타 언덕을 오르고 있는 희생자들의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생존자를 향한 포옹

교황은 고개를 숙인 채 느린 걸음으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입구를 통과했다. 입구에는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t Macht Frei)”라는 구불구불한 글씨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교황은 강제수용소 방문에서 많은 상징적 행동을 보여줬다. 먼저 교수형을 집행하던 대들보 중 하나에 입을 맞췄다. 이어 ‘점호광장’의 차가운 벽에 잠시 머리를 대고 멈춰 있었으며, 10명의 생존자들을 한 명씩 따뜻하게 포옹하기도 했다. 당시 생존자 가운데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101세의 헬레나 두니츠 니윈스카도 있었으며, 교황은 그녀의 머리에  특별히 입을 맞췄다. 생존자들과 만난 뒤 교황은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가 갇혔던 감방으로 이동했다. 콜베 신부는 방 벽면에 몇 가지 낙서를 새겨 놓았는데, 그 가운데 그가 굶주림의 고통을 참으며 기도할 때 응시했던 십자가도 그려져 있었다. 교황은 이 십자가에도 입을 맞췄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

비르케나우

눈으로 소통하는 경호원들부터 방송카메라를 들고 교황을 따라간 기자들까지, 당시 교황의 곁에 있던 많은 이들이 감동적인 체험을 함께했다. 이들은 교황과 함께 기억의 순례를 했으며, 함께 침묵을 지켰다. 교황이 ‘죽음의 문’이라 불리는 문을 나와 1킬로미터가 넘는 기찻길을 따라 전기차를 타고 이동해 비르케나우에 들어선 순간,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 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렸다. 

나무와 벽돌로 지어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둘러본 교황은 가스실을 방문하고자 했다. 그곳은 “최종해결(soluzione finale)”이라는 이름으로 나치가 가스를 살포해 조직적으로 대량학살을 자행한 현장이었다. 173헥타르에 달하는 이 공간에서 지클론B라는 가스에 의해 수백만의 유다인과 외국인 포로가 목숨을 잃었다. 

비르케나우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
비르케나우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

시편과 카디쉬

이곳에서 사망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1967년 독일은 제2화장장과 제3화장장을 폭파하고 그 잔해 위에 국제 기념물을 세웠다. 화장터의 굴뚝을 상징하는 작은 탑이 눈에 띄는 이 기념물은 석관과 비석을 암시하는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교황은 2016년 7월 29일 이곳에서 마침 예식을 주례하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방문을 마무리했다. 종교간 화합의 의미를 담은 마침 예식에서 폴란드 수석 랍비의 카디쉬 낭송이 있었고, 폴란드 마르코바의 한 사제가 시편 130편을 낭독했다. 마르코바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피난 중인 유다인에게 거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나치에게 죽임을 당한 울마 부부와 그 가족이 살았던 곳이다. 

추모 기념비 앞의 기도

교황은 수용소 한쪽에 세워진 추모 기념비 인근에 마련된 23개의 명판 앞에 잠깐 멈춰 섰다. 각각의 명판에는 23개 언어로 이곳에서 일어난 반인륜적 만행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50만 명에 달하는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이 죽임을 당한 이 장소, 수많은 유다인과 유럽의 여러 지역 출신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이 장소가 인류를 향한 절망과 경고의 외침이 되도록 영원히 남겨두십시오. 아우슈비츠 – 비르케나우, 1940-1945년.” 그런 다음, 추모 기념비의 끝부분에 도착한 교황은 계획된 일정이 아니었음에도 다시 한 번 잠깐 멈춰 초를 봉헌하고 기도를 바쳤다. 그 초는 유리 위에 은으로 장식돼 있었고, 초받침은 수용소 막사의 바둑판식 배열에서 영감받아 호두나무로 만들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희생자 추모 기념비 앞에서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아우슈비츠 수용소 희생자 추모 기념비 앞에서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의로운 시민들’과의 만남

이날 교황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방문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상징적 행동은 ‘여러 나라 의로운 시민들’과의 만남과 포옹이었다. 이들은 22명의 남녀 노인들로, 금으로 만든 ‘야드 바셈(의로운 시민상)’ 훈장을 받았다. 한 여성은 교황에게 훈장을 보여줬으며, 교황은 처음으로 입을 열어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교황은 타인을 위해, 포로들을 구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이들을 향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고통의 심연에서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빛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29 7월 2021, 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