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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증명되시는 분이 아니라 증거를 통해 드러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여론”에 관심이 없으시며, “우리 마음속에 당신께서 계신지”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당신을 모시는 것”에 관심을 두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삼종기도에서 이 같이 말했다. 삼종기도에 앞서 교황은 대축일 미사를 통해 신임 관구장 대주교들을 위한 팔리움을 축복했다. 아울러 교황은 수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지만, 증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보는 게 매우 슬프다”고 말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복음의 중심에(마태 16,13-19 참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예수님께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되풀이하시는 중요한 물음입니다. ‘너에게 나는 누구냐?’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아직도 내 말을 세상에 널리 전하기를 두려워하는 ‘너에게 나는 누구냐?’ 오랜 세월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으나 타성에 젖고 첫사랑을 잃어버린 ‘너에게 나는 누구냐?’ 힘든 시기를 겪으며 다시 출발하기 위해 일어나야 하는 ‘너에게 나는 누구냐?’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에게 나는 누구냐?’ 오늘 주님께 응답합시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답을 합시다. 우리 모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답을 주님께 드립시다.

이 물음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3 참조) 이는 당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당신께서 누리시던 명성을 알아내기 위한 설문조사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평판에 흥미가 없으셨습니다. 통상적인 설문조사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차이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본적인 차이’ 말입니다. 첫 번째 질문이나 여론에 그치며 ‘예수님에 관해’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 삶을 바치고 그분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습니다. 주님께서 관심 두시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곧, 우리 생각의 중심에 주님께서 머무시는 것, 우리 감정의 기준점이 되시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의 삶에 대한 사랑이 되시는 겁니다. 이는 주님에 대한 여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에 관심을 보이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당신이 계시는지 아닌지 그것이 그분께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인들은 이러한 발걸음을 내디뎠고 ‘증거자들’이 되었습니다. 여론에서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으로 넘어가는 발걸음, 곧 증거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팬’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구경꾼이 아니라, 복음의 주역입니다. 그들은 말로만 믿은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믿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교사명에 관해 말한 것이 아니라, 선교사명을 살아냈습니다. 그는 사람 낚는 어부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학술서적을 쓴 것이 아니라, 서간들을 썼습니다. 그는 여행을 다니며 증거하는 동안 살아냈던 일을 썼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주님과 형제들을 위해 삶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재촉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첫 번째 질문에 그칠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사람들의 관점이나 여론을 제시하고, 훌륭한 생각으로 멋들어지게 말하지만, 결코 실행에 옮기지 않는 위험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행동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예를 들어 복음에 더 충실하고,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더 예언적이고 선교적인 교회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다음,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견해를 표하고, 논쟁을 벌이지만, 증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보는 게 매우 슬픕니다. 증거자들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열매를 맺습니다. 증거자들은 타인이나 세상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함께 시작합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는 증명되시는 분이 아니라’, 증거를 통해 ‘드러나신다’는 사실을 떠올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가 아니라 모범을 통해 드러나십니다. 이를 “행동에 나서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삶을 바라보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증거자들이지만, 항상 모범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하지만 – 바로 여기에 요점이 있습니다 –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도 증언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 베드로는 복음사가들에게 “내가 저질렀던 잘못들을 기록하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복음을 ‘장난으로’ 만드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노골적으로 드러났고, 복음서에 날 것 그대로 나옵니다. 그의 모든 비참을 고스란히 담은 채 말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 역시 똑같이 행합니다. 그는 서간들에서 자신의 잘못과 약점을 이야기합니다. 증거가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자신의 이중성과 위선과의 싸움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미지를 지키려고 노심초사하지 않고 주님과 타인과 함께 투명한 삶을 살 때,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큰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주님의 질문은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과 똑같습니다. ‘너에게 나는 누구냐?’ 이 질문은 우리 마음속에 파고드는 물음입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는 자신들의 증거를 통해, 우리가 가면을 벗도록, 대충대충 사는 삶이나 미적지근하고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는 핑계를 포기하도록 촉구합니다. 사도들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길 빕니다. 성모님께서 우리 안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열망을 피워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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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6월 2021, 07:27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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