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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 푸코 샤를 드 푸코 

교황 “샤를 드 푸코와 다른 6명의 복자들은 보편 교회를 위한 새 성인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곱 복자의 시성 절차에 대한 투표를 위해 바티칸에서 거행된 정기 추기경회의를 주재했다. 시성식 날짜는 아직 미정이다. 교황청 시성성 장관 세메라로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들은 삶의 헌신 혹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Salvatore Cernuzio / 번역 이창욱

순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이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덕목을 영웅적으로 실천한 이들. 이들 모두 이 세상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데 기여했다. 교회는 이들을 성인으로 선포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명의 여성과 5명의 남성으로 이뤄진 7명의 복자들 및 복녀들의 시성에 대한 투표를 위해 5월 3일 오전 정기 추기경회의를 주재했다. 이들 중 프랑스 출신 사제 샤를 드 푸코는 지난 세기 초 사하라 사막의 중심에서 하느님 말씀의 씨를 뿌렸다. 그는 스스로를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난한 이”요 “보편적 형제”라고 정의했다. 

시성식 날짜는 아직 미정

시성식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교황은 7명의 복자들 및 복녀들을 위해 라틴어로 작성된 양식에 넣을 시성식 날짜를 정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들의 “모범적인 성덕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억했다. 현재의 보건위기상황은 시성식 날짜를 차후로 미루는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

세메라로 추기경 “새 성인들은 은총과 기적의 중재자들”

“이 복자들은 자신들의 빛나는 덕목 때문에 하느님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은총과 기적의 중재자로 (하느님 백성들이) 기도할 것입니다.” 교황청 시성성 장관 마르첼로 세메라로(Marcello Semeraro) 추기경은 삼시경(오전 9시경에 바치는 성무일도) 후, 일곱 명의 복자들 및 복녀들에 대한 “인간적이고 영적인 삶의 간략한 요약”을 추기경회의에 소집된 추기경들과 교황에게 제출했다.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성소를 살았던 이들 가운데 어떤 분은 생명이라는 최고 선물을 통해, 어떤 분은 사랑과 덕목의 영웅적인 실천을 통해, 희망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의 풍요로운 파스카를 증거했습니다.”

샤를 드 푸코

“예수님의 샤를 형제”가 되기 전,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난 젊은 샤를은 군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6세의 나이로 고아가 됐을 때 그는 자신을 키워준 (장군) 외조부의 발자취를 따랐다. 미래에 복자가 될 그는 사춘기 동안 신앙생활을 잠시 접어뒀다. 하지만 1883-1884년 모로코에서 위험한 탐험을 하던 도중 그의 내면에서 “하느님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나의 하느님, 당신이 존재하신다면, 당신을 알게 해 주십시오.” 이러한 그의 요청은 그의 내면의 삶을 특징지었던 끊임없는 기도의 내용을 이미 포함했다. 프랑스로 돌아오자,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는 탐구에 몰두하며 어떤 사제에게 자신을 교육시켜달라고 청했다. 그런 다음 예루살렘 성지로 순례의 길에 올랐고, 그리스도의 삶의 장소인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성소를 발견했다. 곧 침묵과 은둔생활을 통해 예수님을 본받으며,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것이다. 43세의 나이로 사제품을 받은(1901년) 샤를 드 푸코는 알제리 사하라 사막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베니 수도원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난한 이로 살았으며, 이후에는 남쪽 지방에 있는 타만라세트에서 호가르의 투아레그 족과 함께 지냈다. 그는 계속해서 성경을 묵상하며, 모든 이를 위해 “보편적인 형제”가 되려는 끊임없는 열망 안에서 기도의 삶을 살았다. 1916년 12월 1일 저녁, 그는 지나가던 약탈자 무리에 의해 피살돼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은 지난 2005년 그를 복자품에 올렸다.

라자로

그는 복자품에 오른 첫 인도 평신도다. 데바사하얌(Devasahayam)이라고 알려진 복자 라자로(Lazarus)는 한 가정의 아버지요 순교자였다. 트라방코르 힌두 왕국의 브라만의 후손으로, 무사라는 높은 카스트 계급에 속했다. 성인이 되어 그리스도교로 회심해 33세에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회심은 당시 왕국의 관례에 따르면 배신과 위험행동으로 간주됐다. 따라서 그는 체포돼 모욕을 당했고, 관리들에게 고문을 당했는데, 후에 그 관리들은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의 죄명은 무엇이었을까? 힌두교를 저버렸다는 죄명이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은 지난 2011년 그를 복자품에 올렸다.

예수의 마리아 프란체스카

세속명이 안나 마리아 루바토(Anna Maria Rubatto)인 예수의 마리아 프란체스카(Maria Francesca of Jesus) 수녀는 피에몬테 주에서 태어났다. 토리노에서 수년 간 가난한 이들을 간호했고, 코토렌고에서 병자들을 방문했으며, 돈 보스코 오라토리오에서 맡은 책임에 꾸준히 헌신했다. 그녀는 사보나 현 인근에 위치한 로아노 시에 카푸친 제3수녀회를 창립했다. 이 회는 훗날 라틴아메리카로 진출해 가난한 이들을 전력으로 돌보는 데 전념했다. 그녀는 지난 1892년 자신의 수녀들을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로 보냈고, 거기서 단시간 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로 진출시켰다. 예수의 마리아 프란체스카 수녀는 자신의 딸(수녀)들을 방문하고 그들을 동행하기 위해 7번이나 대서양을 횡단했다. 1904년 몬테비데오에서 선종했고, 89년 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지난 1993년 복녀가 됐다.

마리아 도메니카 만토바니

복녀 마리아 도메니카 만토바니(Maria Domenica Mantovani)는 성가정의 작은 자매회의 초대 총장이었다. 그녀는 수녀회 창립을 위해 협조자가 되길 원했던 그녀의 영적 지도신부 복자 주세페 나심베니와 함께 이 수녀회를 창립했다. 그녀는 카리스마와 영성의 발전을 위한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날까지 가난한 이들, 고아들, 병자들에 대한 겸허한 봉사를 위해 삶 전체를 바쳤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녀를 지난 2003년 복녀로 선포했다.

세자르 드 뷔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태어나 예수회원들에 의해 양성을 받았던 복자 세자르 드 뷔(César De Bus)는 사제가 된 후 설교와 교리 교육에 전념했다. 그는 신자들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지난 1572년 그리스도 교리 사제회를 설립해 단순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쉽게 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1603년 부활절 아침 아비뇽에서 선종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지난 1975년 그를 복자로 선포했다.

루이지 마리아 팔라촐로

복자 루이지 마리아 팔라촐로(Luigi Maria Palazzolo)는 베르가모의 사제다. 가장 가난한 소녀들과 여자 고아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성가정 형제수도회와 가난한 이들의 수녀회를 창립했다. 젊은이들과 성인들을 위한 야간학교도 설립했다. 이러한 교육활동과 종교교육을 통해 오라토리오의 40여 명의 젊은이들이 사제가 되려고 마음먹는 결과를 낳았다. 윤리적이고 신체적인 고통을 받다가 58세에 생을 마감했다. 성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 지난 1963년 복자품에 올랐다.

주스티노 마리아 루솔릴로

복자 주스티노 마리아 루솔릴로(Giustino Maria Russolillo)는 나폴리 현에 위치한 피아누라의 사제다. 성소사목을 위한 직무와 삶을 살았고, 성소사목을 위해 성소수도회를 창립했다. 그는 설교자, 강연자, 작가였다. 가정 사목과 지속적인 교리 교육은 그의 본당 공동체를 변화시켰다. (본당은) “성화의 집”이 됐고 수많은 성소의 요람이 됐다. 그의 활동은 어려움에 처한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로 확대됐다. 그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양성을 위해 젊은이들도 도왔다. 그는 지치지 않는 활동으로 인한 여러 가지 오해로 고통을 겪었지만, 이 모든 고통을 항상 동정 마리아께 바쳤다.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은 지난 2011년 그를 복자품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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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5월 2021, 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