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1992년 6월 4-10일 앙골라 사도적 순방 당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1992년 6월 4-10일 앙골라 사도적 순방 당시 

노동의 첫 번째 토대는 사람

식량을 구하고,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며, 사회 전체를 개선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과 교회는 항상 가까이해 왔다. 특히, 레오 13세 교황의 사회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통해 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한 관심을 공식화했다. 이러한 관심은 이후 수십년에 걸쳐 점차 체계화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Laura De Luca / 번역 박수현

모든 범주의 노동자들에 대한 교회의 사랑스럽고 모성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회주의 국가들에 널리 퍼져 있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는 지난 세기 초반의 수십년 동안 심각한 편견을 지속시켰다. 가경자 비오 12세 교황은 1955년 5월 1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이탈리아 그리스도인 노동자 협회(ACLI)’ 회원들과 만나 연설을 통해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의) 편견을 분명히 강조했다.

“제가 얼마나 자주 노동자에 대한 교회의 사랑을 확인하고 설명해 왔습니까! 그러나 ‘교회는 노동자들의 반대편에 서서 자본주의와 동맹을 맺고 있다’는 끔찍한 비방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모든 것의 어머니이자 스승인 교회는 항상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한 자녀들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왔습니다. 또한 실제로 다양한 범주의 노동자들이 이미 이룬 공정한 발전을 달성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저는 1942년 성탄 축하 라디오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언제나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교회는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다양한 체계에 대한 비판을 오늘날에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는 노동자들의 영원한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세태와 영향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자 영원한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연에 순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하느님의 질서와 하느님께서 지상의 재화를 위해 지정하신 목적과 모순되는 (사회적) 구조가 존재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사회적) 구조와 충돌하고 있는 노동자를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조리한) 사회적 구조가 따르는 길은 거짓이고 비난받을 만하며 위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 깊은 곳에서 정의와 형제애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부르심에 누가, 특히 어떤 사제나 그리스도인이 귀를 닫은 채 남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정의와 형제애의 정신으로 성 요한 23세 교황은 5년 후 일부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상황과 모든 사람에게 속한 영적 운명 사이에서 분란을 조장하고 싶어하는 모순에 주목한 바 있다. 다음은 1960년 5월 1일 노동자 성 요셉 축일에 보낸 성 요한 23세 교황의 라디오 메시지다. 만약 이 메시지를 잘못 해석할 경우, 마르크스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이데올로기는 노동자가 갖고 있는 (하느님의) 초월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간의 영감을 부정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잘못된 이데올로기는 한편으로는 억제되지 않은 자유를 증진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격을 억압하여 노동자들을 투쟁의 도구로 축소시키거나 그들 자신의 이데올로기 안에 안주하게 함으로써 노동자의 위대함을 박탈하려고 합니다. 또한 사회 생활의 다양한 범주를 서로 대립시키면서 분쟁과 불화를 심고 싶어합니다. 아울러 소박한 노동자들의 유일한 보호자이자 승리자이시며 우리에게 생명과 움직임과 존재를 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했습니다. 마치 노동자들의 상황이 하느님을 알고 존경하며 하느님을 섬길 의무에서 면제된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 노동자들의 운명과 영적 열망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노동자들을 향한 교회의 사랑을 재확인했다.

“노동자들은 교회가 모성적으로 열렬하고 간절한 애정으로 자신들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이나 궂은일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이러한 일들을 잘 알지 못하거나 (그들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아직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지 못하고 성장하는 가족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걱정을 가진 사람들과 가까이 있습니다. 아울러 직장에서 병이나 사고로 고통스럽게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습니다. 저는 (노동자들의) 더 나은 생활과 노동 조건을 보장하고, 특히 모든 사람들이 안정적이고 품위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어 권한이나 수단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요청할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더욱 절실하고 세심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노동이 그 자체로 가치이며 특정 권리와 보호 범위 내에서 점점 더 인식되고 제한된다고 해도, 과잉생산과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은 결국 다른 것을 희생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시기에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세계 노동자들의 소요 사태가 임금 권리를 주장하는 계층, 곧 경제 위급상황의 빈곤에만 집착하는 계층에게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1969년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 그는 가난이 우리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오늘날 경제적 부의 달성만 목표로 하는 세상, 곧 그것이 따라야 할 진보의 방향과 모순되고, 복지와 소비사회 안에서 오히려 더 역설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세상에서 이 같은 어려움들에 의해 방해 받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가난하고 근면한 요셉 성인에 대해 함께 다시 생각해 봅시다. 요셉 성인은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높은 차원의 유익을 향한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경제적 재화가 탐욕스러운 이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사려 깊은 자애의 수단과 원천이라는 조건이었습니다. 곧 개인적인 노동의 부담을 덜고, 소위 삶의 즐거움을 쉽고 유연하게 즐길 수 있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광범위한 공동선의 유익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모든 이들의 노동은 공유(comune)와 공동체의 목표를 잃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노력 없이 땅에서 모든 이익을 취한 에덴의 신화를 되돌아볼 때, 인간의 노동을 하느님의 형벌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은 2006년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 미사에서 (우리의) 모든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혔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노동이 인간의 원래 상태에 어떻게 속하는지 보여줍니다. 창조주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드셨을 때, 인간에게 땅에서 일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창세 2,5-6 참조). 노동이 고생과 벌이 된 것은 인류의 공통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이었으나(창세 3,6-8 참조), 하느님 계획에서는 그 가치를 변함없이 유지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스스로 우리와 비슷해지시면서 ‘목수의 아들’로 알려지셨고 수년 동안 육체노동에 헌신하셨습니다. (...) 노동은 인간의 성취와 사회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하며, 이러한 이유로 노동은 항상 인간의 존엄성을 온전히 존중하고 공동선을 위해 조직되고 실행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이 노동의 노예가 되는 것, 곧 노동을 우상화하며 그 속에서 삶의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의미를 찾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노동을 우상화하지 않으며 무한한 문제와 그에 연결된 무한한 인간적, 영적 명암을 잃지 않는다. 노동자였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노동자 문제를 면밀히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노력과 열망을 나눴다. 1983년 11월 18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탈리아 주교회의(CEI)가 노동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한 회의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연설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노동자의 영적 지평이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지평 내에서 이뤄진 인간의 노동에 대한 분석은 윤리적·사회적 문제의 중심을 꿰뚫고 새로운 것으로 합당하게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 직업 윤리로 이어집니다. (…) (그것은) 불공정하거나, 비인간적이거나, 보호받지 못하거나, 경멸받는 일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책임을 갖기를 요구합니다. 직업 윤리는 무엇보다도 그것의 주관적인 차원, 곧 사람과 노동의 주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노동의 첫 번째 토대는 사실 사람 자신입니다. 사람이 노동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노동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노동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2021년 5월 1일 바티칸 라디오 방송국에서 노동을 주제로 한 “교황들의 목소리”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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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5월 2021, 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