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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우울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게으름과 분심을 몰아내며 항상 기도하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1년 5월 19일 교황청 사도궁 내 산 다마소 안뜰에서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을 진행했다. 교황은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 “왜요?”라고 물으며 기도하라고 권고하는 한편, 어려운 시기에도 항구함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고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34. 분심, 메마름, 게으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 내용에 따라, 이번 교리 교육은 우리가 확인하고 극복해야 하는 기도의 매우 일반적인 어려움 몇 가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면서, 기도의 생생한 체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는 많은 어려움들이 따릅니다. 우리는 그 어려움들을 인식하고, 식별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어려움은 ‘분심’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729항 참조). 여러분이 기도를 시작하고 나면 곧바로 생각이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온 세상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의 생각도 마음도 그곳에 가 있습니다. (…) 이것이 기도할 때 생기는 분심입니다. 기도는 종종 분심과 공존합니다. 사실 인간의 생각은 한 가지 생각에 오래 머무는 데 힘들어 합니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이미지와 환상을 지속적인 소용돌이로 경험하는데, 심지어 이는 잠자는 동안에도 우리를 동반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러한 무질서한 성향의 뒤를 따르는 게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집중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한 싸움은 단지 기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충분한 단계의 집중력에 도달하지 못하면 공부도 잘 안 되고 일도 잘 안 됩니다. 운동 선수들은 신체적 훈련만으론 경기에서 승리할 수 없으며, 정신적 훈련이 동반돼야 경기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집중할 수 있고,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도 말입니다.  

‘분심’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싸워 이겨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유산 중에 종종 잊혀지지만, 복음 안에 자주 등장하는 덕목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덕목을 바로 “깨어있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이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서 이를 분명하게 언급합니다(2730항 참조). 예수님께서는 자주 제자들에게, 조만간 당신께서 결혼식에서 돌아오는 신랑처럼, 여행에서 돌아오는 주인처럼,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깨어있는 삶에 대한 의무를 상기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돌아오시는 날과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삶의 모든 시간이 소중합니다. 분심 속에서 갈피를 못 잡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우리 주님의 음성이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부지런히 일하는 종들을 찾으실 때, 정말로 중요한 것에 집중한 이들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 안에 떠오르는 모든 매혹을 따라가면서 헤매지 않았으며, 선과 자신들의 임무를 실천하면서 자신들의 올바른 길을 걸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분심이란, 상상력이 돌고, 돌고, 도는 것입니다. (…) 데레사 성녀는 기도 안에서 돌고 도는 이러한 상상력을 “집안의 미치광이(la pazza della casa)”라고 불렀습니다. 마치 미친 사람이 여러분을 수많은 생각으로 헤매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 상상력을 멈추고, 가두어야 합니다. 

‘메마름의 때’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마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생각도 기억도 감정도 없다. 심지어 영적인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이때는 마치 고뇌와 무덤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참된 신앙의 순간이다”(2731항). 메마름은 우리로 하여금 성 금요일과 그날 밤, 그리고 성 토요일 하루 전체를 생각하게 합니다. 곧,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무덤 안에 계신다. 예수님은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혼자다.’ 이것이 바로 메마름을 낳는 근원적인 생각입니다. 종종 우리는 메마름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을 수 있지만, 외적 또는 내적 삶의 특정 상황을 허락하시는 하느님께 달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때때로 여러분의 기도를 방해하는 두통이나 복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 이유를 잘 모릅니다. 영성의 스승들은 신앙의 체험을 위로의 시간과 적막의 시간이 계속 번갈아 가면서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모든 것이 쉬운 순간이 있는가 하면, 강한 무게감으로 짓눌린 순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친구를 만나면 종종 이렇게 물어봅니다. “어떻게 지내니?” 친구는 대답합니다. “오늘은 별로네.” 우리는 자주 “우울”합니다. 곧, 아무런 느낌도 없고, 아무런 위로도 없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도 없을 때입니다. 침울한 나날입니다. (…) 인생에서 그런 날들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우울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 “우울함”이 마음에 들어오면, 마음은 병듭니다. (…) 우울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끔찍한 일입니다. 우울한 마음으로는 기도할 수도 없고, 위로를 느낄 수도 없습니다! 우울한 마음으로는 영적 메마름(aridità spirituale)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열려 있고 밝아야 주님의 빛이 들어옵니다. 주님의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희망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우울함으로 마음을 닫지 마십시오. 

‘게으름’은 (기도 중에 직면하는) 또 다른 유혹입니다. 게으름은 또 다른 결점이며 악습입니다. 게으름은 기도에 대한 진정한 유혹이며, 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유혹입니다. 게으름은 “금욕 정신이 해이하고 경계심이 감퇴하여 마음이 태만해짐으로써 나타나는 일종의 의기소침”(『가톨릭교회 교리서』, 2733항)입니다. 게으름은 7가지 “악습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게으름은 교만으로 양육되어 영혼을 죽음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열정과 의기소침이 번갈아가며 생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항상 앞으로 걸어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영적 삶의 진정한 진보는 탈혼 체험을 거듭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시기에도 인내하며 앞으로 걸어가고, 걸어가고, 걸어가는 (…) 역량에 있습니다. 피곤하면 잠시 멈추어 쉰 다음, 다시 걸으십시오. 항구함으로 말입니다. ‘완전한 기쁨(perfetta letizia)’에 대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비유를 기억합시다. 완전한 기쁨은 한 수도사의 능력으로 평가되는, 천국에서 비처럼 내리는 무한한 행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초심을 모두 잃었더라도 꾸준하게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모든 성인들도 이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했습니다. 그들의 일기를 읽으면서, 무미건조함으로 보낸 저녁 기도 시간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접하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합니다. “나의 하느님, 제가 당신을 믿지 않도록 당신께서 모든 것을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저는 당신께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은 결코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때론 욥의 기도와 비슷합니다. 자신을 매몰차게 대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께 항의하고, 하느님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도 말입니다. 종종 하느님께 항의하는 것도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하느님께 화를 내는 것 또한 기도의 한 방법”이라고 말한 것처럼,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주 화를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아들이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아들이 그를 “아버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

욥보다 훨씬 덜 거룩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우리 역시 마지막 때에, 적막의 시간이 끝날 때, 우리가 하늘을 향해 말없이 외치는 소리와 수많은 “왜?”라는 물음에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라고 외치는 기도를 잊지 마십시오. 이는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알아듣지 못하기 시작할 때 하는 기도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질문의 시기”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아이가 아빠에게 “아빠, 왜요?”라고 묻기 때문입니다. “아빠, 왜요?” “아빠, 왜요?” 하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아이는 질문을 하고도 아빠의 대답을 듣지 않습니다. 아빠가 대답을 시작하지만, 아이는 또 다른 “왜요?”를 준비합니다. 아이는 대답보다 단지 자신에 대한 아빠의 관심을 받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약간 화를 내고 그 이유를 말하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의 불행과 어려움 그리고 우리 삶을 향한 아버지의 관심을 받기 위함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하지만, 왜 그래야 합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내십시오. 때로는 조금 화를 내는 것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과 맺어야 할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 딸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가혹하고 쓰라린 표현조차도,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받아들이시고, 그러한 우리의 표현조차도 우리의 신앙 행위로, 기도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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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5월 202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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