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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 성야 강론 “생명은 새로운 길을 여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시작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월 3일 소수의 제한된 신자들이 참례한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 베드로 사도좌’ 제대에서 파스카 성야 미사를 집전했다. 성야 미사는 불의 축복에 이어 성 베드로 대성전이 (파스카 초의 점등으로) 점차 밝아지면서 시작됐다. “모든 실패, 악, 폭력을 넘어, 모든 고통과 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살아 계시며 역사를 이끄십니다.”

번역 이창욱

여인들은 향료를 발라드릴 예수님의 시신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텅 빈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고인을 애도하려 (그곳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생명의 선포를 들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복음은 그 여인들이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다”(마르 16,8 참조)고 전합니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고 두려웠습니다. 이 경우에는 두려움과 기쁨이 뒤섞여 있는 상태인데,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큰 돌이 굴려져 있었고 무덤 안에 하얀 옷을 입고 있는 한 젊은이를 보면서 그들의 마음이 놀랐던 겁니다. 그의 말을 듣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 이어 다음과 같이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7절). 우리 또한 이 초대를, ‘파스카의 초대’를 받아들입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가시는 갈릴래아로 갑시다. 그런데 “갈릴래아로 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갈릴래아로 간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다시 시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처음으로 그들을 발견하시고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셨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첫 만남의 장소이자 첫사랑의 장소입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그분의 설교를 들으며 그분께서 이루시는 기적들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늘 그분과 함께하면서도, 그분을 밑바닥까지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종종 그분의 말씀을 오해했으며, 십자가 앞에서 도망쳤고, 그분을 홀로 남겨두었습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한 번 더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그들보다 먼저, 다시 말해 그들을 앞서 가고 계십니다. 결코 지치지 않으시고, 그들을 부르시고 당신을 따르라고 다시 부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시작했던 곳에서 다시 출발하자. 다시 시작하자.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넘어서서, 나는 너희가 다시 나와 함께하길 원한다.” 이 갈릴래아에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놀라움을 배웁시다. 우리의 실패로 이어진 길 안에 새로운 오솔길을 찾아내는 그분 사랑의 놀라움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행하시며 갈릴래아에서 이렇게 행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파스카의 첫 번째 선포는 바로 이것입니다. 곧, ‘항상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실패를 넘어 우리 안에는 하느님께서 다시 출발하게 하실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의 폐허에서도 – 우리 각자는 자기 마음의 폐허를 알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 우리 마음의 잔해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예술작품을 만드실 수 있고, 우리 인류의 무너져 내린 폐허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역사를 마련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늘 우리보다 먼저 가십니다. 고통, 절망, 죽음의 십자가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다시 일어서는 생명의 길, 변화하는 역사의 길, 다시 태어나는 희망의 길의 영광에서 우리를 앞서십니다. 또한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어두운 이 시기에, 우리는 결코 희망을 잃지 말고 다시 시작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두 번째로, 갈릴래아로 간다는 것은 ‘새로운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그분과 함께 겪었고 이제는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기념하려고 갑니다. 자신들의 슬픔을 들춰내려고 갑니다. 아름답지만 끝나버렸고, 단지 떠올릴 뿐인 사건에 대한 기념이 된 신앙의 이미지입니다. 수많은 이가 – 우리 또한 – 마치 예수님께서 과거의 인물, 이미 멀어져 간 청춘의 벗, 제가 어릴 때 교리반을 다녔을 때처럼, 오랜 세월 전에 일어난 사건인양, “기억에 대한 신앙”을 살고 있습니다. 습관으로, 과거의 일들로, 유아기의 좋은 추억으로 이루어진 신앙은 더 이상 나를 감동시키지 않고, 더 이상 나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갈릴래아로 간다는 것은, 생기 있는 신앙이 되기 위해, 다시 신앙의 길로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일 여정의 시작을 되살리고, 첫 만남의 놀라움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이미 모든 것을 안다고 우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방법)에 놀라도록 자신을 맡기는 이의 겸손을 갖고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놀라움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서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놀라워하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기라고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쌓아둘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며 항상 놀라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갈릴래아로 갑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파스카의 두 번째 선포입니다. 곧, 신앙은 과거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지나간 인물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지금 여기에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분이 겪고 있는 시련 안에서, 여러분이 마음에 품고 있는 꿈 안에서, 매일 여러분과 함께 걷고 계십니다. 길이 없다고 여기는 곳에 새로운 길을 여시고, “이미 봤다”는 시각과 후회를 거슬러 가도록 여러분을 부추기십니다. 비록 여러분이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의 새로움에 놀라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여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놀라게 하실 것입니다.  

갈릴래아로 간다는 것은 ‘변방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갈릴래아는 가장 먼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혼혈종족으로 이루어진 그 지역은 예루살렘의 정결예식에서 가장 거리가 먼 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셨고, 하느님의 모습과 하느님의 현존이 되시기 위해, 일상생활을 힘겹게 꾸려 나가는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 소외된 이들, 취약한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면서, 낙심하고 모든 것을 잃은 이를 지침 없이 찾으러 가시고, 당신의 눈에 그 누구도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거나 아무도 제외되지 않도록 실존의 변방에 이르기까지 움직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요구하시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갈릴래아로 가라고, 이 현실의 “갈릴래아”로 가라고 요구하십니다. (갈릴래아는) 일상생활의 장소이자, 우리가 매일 가야 할 길이며, 주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가시고 현존하시는 우리 도시의 모퉁이입니다. 시간, 집, 노동, 피로, 희망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이의 삶 안에서 말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우리는 형제들의 얼굴 안에서, 꿈을 꾸는 이의 열정 안에서, 낙심한 이의 체념 안에서, 기뻐하는 이의 미소 안에서, 고통받는 이의 눈물 안에서, 특히 가난한 이들과 가장자리에 놓인 이들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작음 안에서 드러나는지, 어떻게 그분의 아름다움이 단순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안에서 빛나는지에 대해 우리는 놀랄 것입니다.

자, 이제 파스카의 세 번째 선포입니다. 곧, 부활하신 분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시고 우리 삶의 매 순간마다 방문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중심에 당신 현존을 심으셨고, 우리 또한 장벽들을 뛰어넘고, 편견을 이기며, ‘일상의 은총’을 재발견하기 위해, 매일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이에게 다가가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갈릴래아에, 매일의 삶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깨달읍시다. 그분과 함께할 때, 삶이 변할 것입니다. 모든 실패, 악, 폭력을 넘어, 모든 고통과 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주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역사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이 밤에 어두운 시간을, 아직 날이 밝아오지 않은 하루를, 묻힌 빛을, 산산이 부서진 꿈을 여러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가서, 파스카의 선포에 놀라움으로 마음을 여십시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부활하셨다! 갈릴래아에서 너를 기다리신다.” 여러분의 기다림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남아있지 않을 것이고, 여러분의 눈물은 마를 것이며, 여러분의 두려움은 희망으로 이겨낼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주님께서는 항상 여러분을 앞서 가시고, 언제나 여러분 앞에서 걸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더불어, 생명은 늘 다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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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4월 2021,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