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 축성 미사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항상 십자가를 껴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목요일 오전 성 베드로 대성전 ‘성 베드로 사도좌’ 제대에서 성유 축성 미사를 거행했다. 교황은 강론에서 기쁨을 선포하는 시간과 박해의 시간은 “함께 간다”고 강조했다. 곧, 십자가는 “협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Amedeo Lomonaco / 번역 김호열 신부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이 마음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끌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마음은) 흔히 밀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베드로 사도좌’ 제대에서 거행한 ‘성유 축성 미사’에서 이 같이 말했다. 미사에는 소수의 신자들과 로마교구의 사제평의회 소속 사제들이 함께했다. 사제들은 (교황의 강론이 끝난 후) 자신들이 사제 수품 때 했던 서약을 갱신했다. 미사 중에 ‘축성 성유’의 축성(consacrazione)이 있었으며, ‘병자 성유’와 ‘예비 신자 성유’의 축복(benedizione)이 있었다. 교황이 ‘축성 성유’를 축성하기에 앞서 부제가 기름병에 담긴 기름에 향료를 섞었다. 이어 교황은 기도하자고 초대한 다음, ‘축성 성유’ 기름병에 숨을 불어넣은 후 축성 기도를 바쳤다. 교황이 축성 기도를 바치는 동안 공동 집전 사제들은 말없이 ‘축성 성유’를 향하여 축성 기도가 끝날 때까지 오른손을 펴 들었다. 

복음과 십자가

교황은 강론에서 “복음 선포는 항상 구체적인 십자가를 껴안는 것과 연관돼 있다”고 말했다. “말씀의 온화한 빛은 순응하는 마음 안에는 명확함을 생겨나게 하지만, 순응하지 않는 마음 안에는 혼란과 거부를 생겨나게 합니다.” 우리는 이를 “복음 안에서 지속적으로 본다”고 교황은 설명했다.

“밭에 뿌려진 좋은 씨앗은 자라서,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의 열매를 맺지만, 원수가 한밤중에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릴 정도로 원수의 시기심도 불러일으킵니다(마태 13,24-30.36-43 참조).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연민은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도록 끌어당기지 않을 수 없었지만, 반면 큰 아들의 분노와 원망도 불러일으킵니다(루카 15,11-32 참조). 포도밭 주인의 관대함은 맨 나중에 일하러 온 일꾼들이 감사하는 이유이지만, 포도밭의 주인이 선하기 때문에 기분이 상한, 맨 먼저 일하러 온 일꾼들이 투덜거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마태 20,1-16 참조).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예수님의 친밀감은 자캐오, 마태오, 사마리아 여인, (…) 과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경멸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자신의 아들은 존중해 줄 것이라 생각하면서 아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낸 포도밭 주인의 관대함은 소작인들 안에서 온갖 상상을 초월한 잔혹함을 생겨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분을 죽이는 죄악의 신비에 직면해 있습니다(마태 21,33-46 참조). 이 모든 것은 기쁜 소식(복음)의 선포가 박해와 십자가와 신비스럽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협상할 수 없습니다

교황은 십자가가 주님이 태어나시기 전부터 “주님의 삶 안에 존재했고”, “천사의 선포 앞에서 마리아가 가진 첫 번째 놀라움 안에 이미” 존재했으며, “자신의 약혼녀와 파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잠 못 이루는 요셉의 고뇌 안에” 존재했고, “헤로데의 핍박과 성가정이 겪은 고난 속에 존재했다”고 말했다. 이어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부터 당신의 친구들의 배신을 받아들이셨으며, 불법 구금과 즉결 심판, 불합리한 선고, 아무런 이유 없이 때리고 침 뱉는 (…) 등의 악의를 감수하셨다”고 말했다. 교황은 “예수님은 십자가 전체를 껴안으셨다”며, 그 이유는 “십자가에는 모호함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십자가는 상황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협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교황은 “십자가에는 우리의 인간 조건, 우리의 한계, 우리의 취약성의 필수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무엇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십자가에서 우리의 (인간적) 나약함과 상관없는 무엇인가가 발생한다”며 “그것은 바로 무력해 보이는 십자가를 보고서, 독을 넣기 위해 물어 뜯고,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떨어뜨리려는 뱀의 물어 뜯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님의 육신은 “뱀에겐 독”이, 우리에겐 “악마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해독제가 됐다”고 교황은 설명했다.

십자가는 악마에게서 해방시킵니다

교황은 “복음을 선포할 때 십자가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화해를 이룬 십자가는 악을 이기고 악마로부터 해방시키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힘을 지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껴안는 것은 (…) 우리 삶에 예기치 않게 십자가가 나타날 때마다 악마가 우리를 마비시키려는 스캔들의 독을 식별하고 거부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아울러 교황은 “지금 이 시대가 스캔들의 시대”라고 말했다. 

“우리는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걸려 넘어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선포하신 구원의 기쁜 소식이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울려 퍼지지 않고,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협박 속에서 울려 퍼졌음을 보시고도 말입니다. 우리는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걸려 넘어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실 때마다 생겨난 도덕적이고 율법적이며 성직주의적인 토론과 논쟁 속에서도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갇힌 이들을 해방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걸려 넘어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거나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들 가운데서 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걸려 넘어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사를 포용하는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신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지방신문의 3면을 겨우 장식할 정도의 스캔들로 받아들여지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선포가 우리의 설득력 있는 언변이 아니라 십자가의 권능으로부터 그 효력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동 그리고 필요하다면 말로 복음을 선포하며 십자가를 껴안는 방식에서 두 가지 사항은 분명합니다. 한 가지는 복음으로 인한 고난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넘치는 그리스도의 고난’(2코린 1,5)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예수님을 위한 종’(2코린 4,5)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교황은 하나의 성찰을 하게 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면서 강론을 마무리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항상 우리에게 주시지만, 당신의 거룩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 방식은 바로 십자가와 관련됩니다. 고통을 원하셔서 그러시는 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교황은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번은, 제 인생에서 매우 어두운 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저를 자유롭게 해 주시길 주님께 은총을 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몇몇 수녀님들을 위한 연례 피정을 지도하러 갔었습니다. 피정 마지막 날에, 그 당시 관습대로, 수녀님들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습니다. 아주 맑고 빛나는 눈을 가지고 계신 나이 지긋하신 수녀님 한 분이 고해성사를 하러 오셨습니다. 그 수녀님은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수녀님에게 저를 위해 부탁 한 가지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수녀님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녀님, 저는 주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보속으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수녀님께서 주님께 청하면, 주님께서 저에게 은총을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그 수녀님은, 기도하듯, 한참을 기다렸다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확실하게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방식으로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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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4월 2021, 1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