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삼종기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삼종기도 

“비록 우리가 잘못하더라도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로 우리를 어루만져주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월 10일 주님 세례 축일 삼종기도에서 하느님의 모습은 자비이며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섬김의 몸짓에서 우리는 그분을 발견한다고 강조했다. “사랑은 사랑을 부릅니다.” 교황은 삼종기도 말미에 이날 시스티나 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아야 했던 아이들을 떠올리며 그들을 위한 강복과 기도를 약속했다(*편집주: 전통적으로 시스티나 성당에서 치르던 유아세례식은 올해 코로나19 방역으로 각 본당에서 거행된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1월 10일) 우리는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냅니다. 며칠 전 우리는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받은 아기 예수님을 만났지만, 오늘은 요르단 강가에서 어른이 되신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오늘 전례는 우리로 하여금 약 30년을 뛰어넘게 합니다. 우리는 이 30년에 대해, 예수님이 가정에서 지내신 감추어진 삶의 세월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처음 몇 년은 헤로데의 박해에서 도망치기 위해 난민으로 이집트에서 보내셨고, 다른 몇 년 간은 요셉의 (목공) 일을 배우면서 나자렛에서 지내셨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일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가정에서 지내신 세월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삶의 모든 나날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사시면서, 지상에서 보낸 시간 대부분을 그렇게 보내셨다는 사실은 감동스럽습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설교, 기적, 그리고 많은 일을 하시며 보낸 세월은 3년이었습니다. 3년 말입니다. 나머지 세월은 모두 가정에서 보내신 감추어진 삶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곧 우리에게 일상의 위대함과 그 중요성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삶의 순간은 하느님의 눈에 중요합니다. 비록 그것이 가장 단순하고 심지어 감추어진 순간이더라도 말입니다. 

이 감추어진 30년의 삶 이후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됩니다. 공생활은 정확히 요르단 강에서 받으신 그분의 세례와 함께 시작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이신데, 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십니까?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참회예식으로 이뤄졌고, 자기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며, 더 나은 존재가 되고, 회심하겠다는 뜻의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기를) 반대하려 애썼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계속)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죄인들과 함께 머물고 싶어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죄인들과 같은 줄에 서셨고 그들과 똑같은 행동을 취하셨습니다. 사람들의 태도로 세례를 받으신 겁니다. 어떤 전례 찬가가 노래하는 것처럼, “벌거벗은 영혼과 맨발”로 다가서는 태도 말입니다. 벌거벗은 영혼, 다시 말해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그러한 죄인의 태도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취하신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조건에 잠기시려고 강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사실 세례는 “잠김”을 뜻합니다. 당신의 공생활 첫날, 예수님은 이처럼 당신의 “계획된 드러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높은 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군주의 결정이나 무력, 교령을 통해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우리를 만나러 오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어떻게 세상의 악을 이기시는지 보여줍니다. 곧, 자신을 낮추시고, 짐을 짊어지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타인들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곧, 단죄하지 않고, 무엇을 할지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고, 함께 (고통을) 겪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음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신명 4,7) 가까이 계심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연민의 행위 다음에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곧, 하늘이 열리고 마침내 성삼위가 계시됩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고(마르 1,10 참조) 성부께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하느님께서는 자비가 나타날 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이점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자비가 나타날 때 드러내십니다. 자비가 하느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종이 되셨기에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우리에게 당신을 낮추셨기에 성령께서 그분 위에 내려오십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섬김의 행위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자비의 행동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시선을 세상에 두십니다. 우리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행하기 전에, 우리 삶은 우리에게 베풀어진 자비로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무상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은 무상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 자비의 무상의 행동입니다. 성사적으로 이는 우리가 세례를 받은 날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지 않은 이들도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히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바로 거기에 계시고,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가까이 다가오시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만, 당신 자비를 통해 우리를 어루만져주십니다.

이제 성모님께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도록 우리를 도우시길 기도합시다. 다시 말해 신앙과 삶의 근간이 되는, “자비를 입은” 존재라는 정체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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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월 2021, 2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