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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자 어머니이시며, 세상을 강복하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2월 2일 교황청 사도궁 도서관에서 진행된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에서 서로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권고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축복한다면 전쟁은 분명히 없을 것입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17. 강복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기도의 본질적인 차원 한 가지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바로 강복 혹은 축복에 관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기도에 관해 살펴봅시다. 창조 설화 안에서(창세 1-2장 참조) 하느님께서는 반복해서 생명을 강복하십니다. 언제나 강복하십니다. 동물들을 강복하시고(창세 1,22), 남자와 여자를 강복하시고(창세 1,28), 마지막으로 휴식의 날이자 창조된 모든 피조물에 만족하는 날인 안식일을 강복하십니다(창세 2,3). (모든 것을) 강복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성경의 첫 페이지에는 강복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강복하시고, 사람들 또한 서로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강복과 축복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강복은 강복을 받은 사람의 전 생애 동안 함께하고, 사람의 마음이 하느님에 의해 변화되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게 합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 61항 참조).

세상 창조 때, 하느님께서는 “좋게-말씀하십니다”(dice-bene). 좋게 말씀하십니다. 좋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좋고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창조 사업을 마치시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고 하십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느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것 안에 새겨 주신 아름다움은 변하게 되었으며, 인간은 세상에 악과 죽음을 퍼뜨릴 수 있는 타락한 피조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느님이 새겨 주신 그 첫 번째 강복의 표식, 곧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 본성 및 우리 모두 안에 새겨 주신 선함의 표식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가진 축복하는 능력이고, 우리는 강복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는 데 실수하지 않으셨으며, 인간을 창조하시는 데도 실수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희망은 온전히 하느님의 강복 속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프랑스 시인 샤를 페기가 말했듯이,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선을 희망하십니다.[1] 

하느님의 가장 큰 강복은, 하느님의 큰 선물이신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는 전체 인류를 위한 강복이며, 우리 모두를 구원한 강복입니다. 예수님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로마 5,8) 아버지께서 우리를 강복하신 영원한 말씀이십니다. 육신이 되시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봉헌하신 말씀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을 감동적으로 선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에페 1,3-6). 어떤 죄도 우리 각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전히 지울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죄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형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말입니다. 이를 손상시킬 수는 있지만,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죄인은 오랫동안 자신의 잘못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마음이 언젠가는 열리고 변화되기를 바라면서 끝까지 참고 기다리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좋은 아버지와 같고, 좋은 어머니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좋은 어머니이시기도 합니다. 당신 자녀들이 잘못하더라도 언제나 사랑하시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교도소 앞에서 줄을 서 있는 것을 여러 번 본 게 생각납니다. 수감되어 있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줄 서 있는 많은 어머니들입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아들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버스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 이 사람은 죄수의 엄마구나”라고 흉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녀들은 그 상황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어쩌면 부끄러워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끄러움보다 아들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에게 있어 우리는 우리가 지을 수 있는 죄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시고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며, 순수한 사랑이시며, 우리를 영원히 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강복하시는 것을 절대로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같은 내용의 성경 대목을 교도소나 재활공동체에서 읽는다면 강력한 체험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들의 중대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들의 선을 원하시며 마침내 그들이 선을 향해 마음을 열길 바라신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조차도 그들이 회복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버린다 하더라도, 하느님에게 있어서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당신 아드님의 형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 각자는 하느님의 아들딸들입니다. 가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기적 말입니다. 자녀가 될 수 있게 기름 부음 받는 이러한 축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삶을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결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자캐오에게 하신 일을 생각해 봅시다(루카 19,1-10 참조). 모든 이가 자캐오에게서 악을 보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그에게서 한 가닥의 선한 빛을 보시고, 그것에서 출발하여, 당신을 보려는 그의 호기심을 구원하는 자비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선 자캐오의 마음이 바뀌었고, 그런 다음에는 삶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부당하고 거절당한 사람들에게서 아버지의 지울 수 없는 강복을 보십니다. 자캐오는 공개적인 죄인으로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서 아버지의 지울 수 없는 강복의 표징을 보셨고, 그로 인해 ‘가엾은 마음(compassione, 연민)’이 드셨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ne ebbe compassione)”는 복음에서 자주 반복되는 문장입니다. 이 가엾은 마음이 자캐오를 돕고, 그의 마음을 바꾸도록 작용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마태 25,31-46 참조). 우리 모두가 심판 받을 최후의 심판의 “기준”에 대해 말하고 있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굶주렸고, 내가 헐벗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었고, 내가 병들었고, 내가 그들 안에 있었다. (…)” 

강복하시는 하느님께 우리도 축복으로 응답합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복을 빌어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축복해야 합니다. 바로 찬미와 흠숭과 감사의 기도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찬미 기도는 하느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곧, 하느님께서 강복해 주시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626항). 기도는 기쁨과 감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회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때뿐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강복해 주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축복할 수는 없지만,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고, 하느님과 형제들을 축복하고, 세상을 축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온유함의 뿌리이고, 축복받았다는 것을 느끼는 능력이고, 축복하는 능력입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축복한다면 전쟁은 분명히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축복이 필요하고, 우리는 축복을 주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축복하는 기쁨과 하느님께 감사하는 기쁨, 하느님으로부터 저주가 아니라 축복하는 것을 배우는 기쁨만 가지고 있습니다. 저주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 항상 입과 마음 안에 상스러운 말과 저주를 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각자 생각해봅시다. ‘나도 이런 저주하는 습관이 있는가?’ 이런 습관이 있다면 이런 습관을 바꿀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합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강복받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강복받은 마음에서는 저주가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길 빕니다. 

 

[1] 「두 번째 미덕의 신비의 현관」, 1911년(프랑스어 초판); 「두 번째 미덕의 신비의 현관」, Jaca Book, 밀라노, 1997년(이탈리아어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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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12월 2020, 2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