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기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2월 9일 교황청 사도궁 도서관에서 기도에 관한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을 이어가며, 일상의 사소한 일에도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라고 초대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우리의 더듬거리는 청원조차도 들어주십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18. 청원 기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 기도에 관해 살펴봅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온전히 인간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으로 기도하고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찬미와 청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자녀의 신뢰 관계 안에서 우리의 모든 바람을 청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가장 큰 은총들을 하느님께 청합시다.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며,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청합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청원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청하고, 다음에는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고 그 나라의 도래에 협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청해야 한다”(2632항)고 말합니다. 반면,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또한 “일용할 양식”과 같은 가장 소박하고 일상적인 선물을 청합니다. 이는 건강, 주거, 직업 및 일상적인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찬례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도 청합니다. 이 또한 일상적인 일이며, 우리는 언제나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 관계 안에서 평화를 청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유혹에 빠졌을 때 도움을 청하고,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시길 청합니다. 

바라고 청원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가르침을 들어봅시다. “청원기도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한다.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원(起源)도 아니고, 우리가 당하는 역경을 마음대로 없앨 수 있는 주인도 아니며, 우리의 궁극의 목적도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아버지께 등을 돌린 죄인임을 알고 있다. 청원은 이미 아버지께로 돌아섬을 의미한다”(2629항).

누군가가 나쁜 일들을 행해서 기분이 나쁘다면 그는 죄인이지만, 그럴 때 그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이미 그는 주님께 다가서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면서, 자기 자신에 만족하고, 혼자 완전히 자기만족에 빠져 살 수 있다고 믿기도 합니다. 때때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은 곧바로 사라집니다. 인간은 청원이며, 때로는 부르짖음이 됩니다. 이따금씩 속으로 참고 있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시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물기 없이 메마른 땅과 같습니다(시편 63,2 참조).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의 매 순간 우울하거나 외로움을 느끼는 시간을 체험합니다. 성경은 질병과 불의, 친구들의 배신이나 적들의 위협으로 점철된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는 데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때로는 모든 것이 무너지고, 지금까지의 인생이 헛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출구가 없어 보이는 이러한 막다른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부르짖음과 기도입니다. “주님 , 저를 도와주십시오!” 기도는 가장 어두운 암흑 속에서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 기도가 길을 열고 여정을 엽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피조물과 함께 이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공유합니다. 오로지 인간만 이 광활한 우주에서 “기도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 각각이 하느님에 대한 갈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2-24). 나무, 바위, 동물 (…) 등 피조물의 다양한 신음이 우리 안에서 울려 퍼집니다. 모든 것은 완성을 갈망합니다. 테르툴리아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기도합니다. 가축과 야생 짐승들도 외양간이나 굴에서 나올 때 무릎을 꿇고 하늘을 쳐다보며 자기들이 아는 대로 울음 소리를 내면서 기도합니다. 새들까지도 몸을 치솟아 하늘로 높이 오를 때 마치 팔을 벌리듯 십자 모양으로 날개를 펼치고 기도 같은 소리로 재잘거립니다”(『기도론』(De oratione), XXIX). 이는 바오로 사도가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며 기도하고 있다”고 말한 것을 설명하기 위한 시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적으로 기도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도움이 필요할 때,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인과 셈을 해야 하는 약은 집사에 대해 언급하시는데, 그 집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움을 청하자니 창피한 노릇이구나.”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또한 하느님께 청하는 것도 부끄러워 합니다. “주님, 저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는 이러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처럼 기도하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선 안 됩니다. 이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향하는 우리 마음의 부르짖음입니다. 우리는 행복할 때도 청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당연하게 주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니다. 항상 주십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저절로 솟아오르는 청원을 억누르지 맙시다. 청원 기도는 우리의 한계와 우리의 본성을 피조물로 받아들이는 것과 함께 보조를 맞춥니다. 심지어 하느님을 믿는 데까지 이르지 못할 수는 있지만, 기도를 신뢰하지 않는 것은 어렵습니다. 기도는 단순하게 존재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부르짖음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모두는 오랜 시간 동안 침묵에 잠긴 이 내면의 소리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지만, 언젠가 이 내면의 소리가 깨어나 고함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편을 보면, 자신의 비통함을 하느님께 바친 사람의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은 기도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응답하십니다. 오늘, 내일,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지 응답하십니다. 항상 응답하십니다. 성경은 이를 셀 수 없이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담겨 있는, 우리가 말하기조차 부끄러워 더듬거리며 하는 청원들도 하느님께서는 들어주시고, 기도에 활기를 불어넣고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십니다. 문제는 언제나 인내에 관한 것입니다. 기다림을 견뎌내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성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 전체도 기다림입니다. 기도도 언제나 기다림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때는 죽음조차도 두려워 떱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모든 사람이 죽음보다 더 강한 동맹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동맹자는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죽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패배했고, 모든 것이 완성될 날이 오면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삶과 행복을 비웃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법을 배웁시다. 주님께서는, 성탄절과 부활절과 같은 큰 축제 때만 우리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매일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 우리를 보러 오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것을 종종 깨닫지 못한 채, 그분께서 지나쳐 가시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지나가실 때가 두렵습니다. 그분께서 지나가시는데 내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주님께서 지나가시고, 주님께서 오시고,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귀가 다른 소음들로 가득하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다리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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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12월 2020, 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