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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Vatican Media)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강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강론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으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우리가 사랑받는 자녀들이라는 진리는 미래에 대한 그 어떤 두려움보다 강력한 “우리 희망의 무너지지 않는 중심”이자 우리의 모든 새로움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주님 성탄 대축일 – 밤 미사

이 밤에 이사야의 위대한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 9,5).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이 아이의 탄생이라고 종종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아이의 탄생은 모든 것을 바꾸는 특별한 사건입니다. 예상치 못한 힘을 솟아나게 하고, 힘든 일과 불편함, 뜬눈으로 지새는 밤도 거뜬히 이겨내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성탄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가 해마다 내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모든 시련에 맞설 힘을 예수님 안에서 찾게 하는 새로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를 위한 것, 나를 위한 것, 여러분을 위한 것, 우리 각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하여(per)’라는 말이 이 거룩한 밤에 다시 울려 퍼집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를 위하여 한 아기가 태어났다”고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화답송을 통해 “오늘 우리를 위하여 구원자께서 태어나셨다”고 노래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다”(티토 2,14 참조)고 말하고, 복음에서 천사는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11 참조)고 선포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위하여(per noi)’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아드님, 본성상 복되신 분께서 은총을 통해 우리를 복된 자녀들로 되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려고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입니까!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놀라게 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놀라움이다.” 자매님, 형제님,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잘못했다고 자책하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지 말아라. 너는 내 자녀다!” 여러분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느끼고, 부적절한 존재라고 두려워하며, 시련의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두려워하십니까?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여러분에게 말로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을 위해, 몸소 아들이 되심으로써 직접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여러분의 모든 새로움의 출발점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아들딸임을 깨닫는 데 있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 희망의 무너지지 않는 중심이며, 우리 실존을 지탱하는 빛나는 핵심입니다. 우리의 자질과 결점들 아래에는 과거의 상처들과 실패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보다 더 강력한 다음과 같은 진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사랑받는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 없이 베푸시는 사랑이며, 순전한 은총입니다. 오늘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고 말했습니다.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사물을 주신 게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기쁨이신 외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배은망덕과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에 대한 불의를 바라보면 의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토록 많이 주신 것이 잘하신 일인가? 주님께서 아직도 우리를 믿어 주시는 것이 잘하신 일인가? 그분께서 우리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은 아닌가?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과대평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하십니다. 우리와는 너무 다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 위한 그분의 비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내면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임을 알고 계십니다. 변함없이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였을 때라야 우리가 더 나아진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가장 깊은 상처를 치유하며, 불만과 분노와 불평의 악순환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어두운 마구간의 보잘것없는 구유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참으로 계십니다.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왜 그분께서는 한밤중에, 마땅한 숙소도 없이, 가난과 배척 속에서 태어나셨는가? 예수님은 가장 웅장한 왕궁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태어날 자격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분의 구체적 사랑으로 우리의 끔찍한 비천함까지 어루만져 주시기까지, 우리 인간의 조건을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걸 우리로 하여금 알아듣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버림받은 이로 태어나셨습니다. 버림받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일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리고 약한 어린 아이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나약함을 온유한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찾읍시다. 하느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처럼, 우리의 가난을 통해 우리와 함께 위대한 일을 하길 좋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구원을 마구간 구유 안에 두셨고, 우리의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비참을 변화시키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깁시다. 

우리를 위하여 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위하여’를 듣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이 표징, 곧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는 우리를 위한 표징, 또한 우리의 삶을 인도하기 위한 표징입니다. “빵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베들레헴에서 하느님은 구유에 누워 계십니다. 마치 우리가 살기 위해서 먹을 양식으로 그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조건 없고, 지칠 줄 모르고, 구체적인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움직이도록 우리를 내어 맡겨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오락과 성공과 세속적인 것에 굶주려서, 결코 우리를 채우지 못하고 그저 공허함을 남기는 음식으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려고 합니까!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소도,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당신 백성인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신 당신을 알지 못한다고 한탄하십니다(이사 1,2-3 참조). 사실입니다. 만족을 모르는 소유욕 때문에, 우리는 베들레헴의 구유를 잊고 수많은 허영의 구유에 우리 자신을 내던집니다. 모든 것에서 가난하지만 사랑으로는 부유한 그 구유는 생명의 양식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되십니다. 말은 하지 않으시지만, 삶을 봉헌하십니다. 반면 우리는 말은 많이 하지만, 자주 선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어린 자녀를 둔 사람은 얼마나 큰 사랑과 인내가 필요한지를 압니다. 아이를 먹이고, 보살피고, 씻기고,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의 요구와 약함을 보살펴야 합니다. 아이는 여러분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지만, 또한 여러분이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이들을 돌보도록 재촉하시기 위해 아이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의 여린 울음은 우리의 수많은 변덕이 얼마나 쓸모 없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무장해제되고, 무장해제시키시는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가진 시간을 우리 자신을 위해 슬퍼하도록 보낼 게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의 눈물을 위로하는 데 써야 한다는 점을 일깨웁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섬김으로써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위해 가난하고 궁핍한 거처를 우리 가까이에 마련하십니다. 한 시인이 말했듯, 오늘밤부터 “하느님의 거처는 내 거처 옆에 있습니다. (그 집의) 가구는 사랑입니다”(에밀리 디킨슨, 『시선집』, XVII).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 당신께서 저를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꿈꾸는 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저를 사랑하십니다. 구유에 계신 아이인 당신을 품어 안음으로써 저는 제 삶을 품어 안습니다. 생명의 빵이신 당신을 맞아들이며 저 또한 제 생명을 내어 놓고자 합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니 제가 섬길 수 있도록 가르쳐 주소서. 당신은 저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니 제가 당신의 형제자매들을 위로하도록 저를 도와 주소서. 왜냐하면 오늘 밤부터 모두가 저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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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2월 2020, 2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