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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과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기도하지 마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21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기도에 관한 교리 교육 여정을 이어가며 시편 기도에 대한 해설을 마무리했다. 교황은 시편이 우리 자신뿐 아니라 형제들과 세상을 위해 하느님께 청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강조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교리 교육 11.  시편 기도. 2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일반알현 진행방식을 조금 변경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스크를 착용한 채로 서로 간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저 역시 여러분과 간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는 제가 그동안 항상 해 왔던 것처럼 여러분과 인사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여러분과 인사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여러분 모두가 저를 향해 다가오기에 여러분이 서로 간격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여러분 사이에 감염 위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죄송하지만 여러분의 안전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악수하고 인사하는 대신, 서로 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인사하지만, 제 마음은 여러분의 가까이에 있다는 점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을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참석자들은 박수로 이에 응답한다.] 일반알현을 시작하면서 독서자들이 성경 구절을 낭독하고 있는 동안 울고 있던 한 아이가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아이가 울자 엄마가 아이를 달래며 젖을 물리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저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일을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온유한 사랑으로 아이를 달래고 젖을 물리려 애썼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여기서 이러한 일이 생긴 것처럼, 성당 안에서 이처럼 아이가 울 때, 우리는 하느님의 온유한 사랑의 상징인 어머니의 온유한 사랑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당 안에서 아이가 울 때, 아이가 울지 못하게 하지 마십시오.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울음소리는 하느님의 온유한 사랑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 어머니의 증거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시편 기도에 관한 교리 교육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선 시편 안에는 “악마”, 다시 말해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부정적인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합시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고, 자신의 오만함에 그 어떤 제동도 없이,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까닭에 시편집은 기도를 삶의 근본적인 현실로 제시합니다. 금욕주의의 대가들이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부르는 절대자와 초월자에 대한 언급과 우리를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를 구원하는 경계입니다. 이는 우리가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방식으로 삶을 무릅쓰지 않도록 막아줍니다. 기도는 인간의 구원입니다.

물론 가짜 기도도 있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들에게서 칭찬받으려는 기도입니다.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혹은 자신이 구매한 최신 명품을 보여주기 위해, 혹은 좋은 사회적 평판을 얻기 위해 미사에 참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짜 기도를 하러 갑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마태 6,5-6; 루카 9,14 참조). 하지만 우리가 올바른 기도의 영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이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현실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관상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두께(깊이)”를 얻습니다. 이는 기도를 하면서 흥미로운 점입니다. 아마 우리는 작은 것에서 시작하지만 기도 안에서 그것이 두께를 얻고 묵직해집니다. 마치 하느님이 그것을 손에 쥐고 변화시키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과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악의 봉사는 피곤을 느끼며 기도하는 것,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앵무새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삶의 중심입니다. 기도가 있으면 형제, 자매, 원수도 중요해집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의 오래된 격언은 “하느님과 더불어 모든 이를 하느님처럼 여기는 수도승은 행복하다”(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기도에 관한 단상』, 123항)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흠숭하는 이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존경하는 이는 인간을 존중합니다. 

이런 까닭에 기도는 삶의 걱정들을 덜어주는 진정제가 아닙니다. 어쨌든 그러한 기도는 확실히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는 우리 각자를 책임 있게 만듭니다. 이를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서 분명하게 봅니다.

이러한 기도법을 배우는데 있어서 시편집은 훌륭한 교재입니다. 우리는 시편이 항상 세련되거나 친절한 말을 사용하지 않고, 종종 실존의 상처들로 점철돼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시편 기도들이,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것 조차도, 먼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됐으며, 후에는 회당에서 사용됐습니다. 이에 대해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시편 기도에 담겨진 다양한 표현들은 성전의 전례 안에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구체화된 것들이다”(2588항)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개인적인 기도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로부터, 그리고 교회 백성의 기도로부터 길어 올려져서 자라납니다. 

한 개인의 가장 내밀한 생각과 문제들을 털어 놓는, 1인칭 단수로 표현된 시편조차 모든 이가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공동의 유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성전과 세상을 하나로 묶는 이러한 “호흡”과 영적 “긴장”을 갖고 있습니다. 기도는 성당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시작될지 모르지만, 이후 도시의 거리로 나옵니다. 반대로, 기도는 일상의 삶에서 싹트고 전례 안에서 그 완성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문은 장벽이 아니라, 모든 이의 외침을 기꺼이 듣는 “투과막(membrane permeabili)”입니다. 

시편 기도 안에서도 세상은 항상 존재합니다. 예컨대 시편은 가장 약한 자의 구원에 대한 거룩한 약속의 목소리를 제공합니다. “‘가련한 이들에 대한 핍박과 가난한 이들의 신음 때문에 이제 내가 일어서리라.’ 주님께서 이르신다. ‘그가 갈망하는 대로 나 그를 구원으로 이끌리라’”(시편 12,6). 혹은, 시편은 세속의 부에 대한 위험을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 있으면서도 지각없는 사람은 도살되는 짐승과 같기”(시편 49,21) 때문입니다. 또한 시편은 역사에 대한 하느님 시선의 지평을 열어 줍니다. “주님께서 민족들의 결의를 꺾으시고 백성들의 계획을 좌절시키신다. 주님의 결의는 영원히, 그분 마음의 계획들은 대대로 이어진다”(시편 33,10-11). 

요컨대 하느님이 계신 곳에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명확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를 먼저 보시고, 우리를 먼저 이해하셨기에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루 동안 많은 묵주기도를 하고 나서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하고, 마음에 원한을 품으며, 다른 사람을 증오한다면, 그 묵주기도는 순전히 인위적인 것이며 진실하지 않습니다.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19-21 참조). 성경은 하느님을 진실로 찾고 있지만 결코 그분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도 인정합니다. 또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고통과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에게 각인된 하느님의 형상을 부인하는 사람의 “무신론”을 참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일상의 무신론입니다. 곧, 나는 하느님을 믿지만,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천적 무신론(ateismo pratico)입니다.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신성모독이며, 혐오스러움이며, 성전과 제대에 직접적으로 가해질 수 있는 최악의 모욕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시편 기도는 “사악함”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시편 기도는 우리가 마치 하느님과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면서 그러한 방식으로 기도하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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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0월 2020, 2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