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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관상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달린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코로나19 대유행이 지속되는 가운데 9월 16일 교황청 사도궁 내 산 다마소 안뜰에서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을 이어 나갔다. 교황은 “자연을 착취하며 사는 사람은 결국 사람을 착취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모든 사람의 임무는 “다음 세대에게 미래를 선사하기 위해” 피조물을 지키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세상 치유”:  7. 공동의 집을 돌보고 관상하는 태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전염병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를 돌보고 서로가 서로를 돌봐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약한 사람들, 병든 이들, 노인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지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노인들을 모른 체하며 저버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한 습관은 나쁩니다. 스페인어로 “뀌다도레스(cuidadores)”는 환자들을 돌보는 사람들, 곧 간병인들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과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하더라도 오늘날 사회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를 돌보는 것은 우리 인간의 황금률이며 우리에게 건강과 희망을 줍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70항 참조). 아픈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버려진 사람을 돌보는 것은 인간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보화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돌봄을 우리 공동의 집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곧, 지구와 모든 피조물을 향해서 말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찬미받으소서」, 137-138항 참조), 우리의 건강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돌보라고 지시하신 생태계(ecosistema)에 달려 있습니다(창세 2,15 참조). 반대로 생태계를 착취하는 것은 그것을 손상하고, 해치고, 아프게 하는 중대한 죄입니다(「찬미받으소서」, 8, 66항 참조). 이렇게 우리 공동의 집을 오용하는 것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관상입니다(「찬미받으소서」, 85, 214항 참조). 하지만 왜 그렇습니까? 그러한 것에 대한 백신은 없습니까? 공동의 집을 돌보고, 지구를 버려 두지 않기 위한 백신은 없습니까? 공동의 집을 돌보지 않는 질병에 대한 백신이 무엇입니까? 그 백신이 바로 관상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경탄하며 음미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에게 모든 것이 멋대로 사용하고 착취할 대상으로 변질되어 버린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습니다”(「찬미받으소서」, 215항). 또한 “일회용”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공동의 집, 피조물은 단순한 “자원”이 아닙니다. 다양한 피조물들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저마다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와 선의 빛을 반영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339항). 이 가치와 이 거룩한 빛의 광선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침묵하고, 경청하고, 관상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관상은 또한 영혼을 치유하기도 합니다.

관상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우리의 역할을 과도하게 확대해서 우리를 다른 모든 피조물의 절대적 통치자로 자리매김하는, 모든 것의 중심에 “나”가 있는, 균형 잡히지 않고 교만스러운 인간중심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창조에 관한 성경 본문을 왜곡한 해석은 지구를 질식시킬 정도로 착취하게 만든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를 형성하는데 기여했습니다. 피조물을 착취하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가 중심에 있다고 믿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며, 피조물의 조화와 하느님 계획의 조화를 망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수호자라는 우리들의 소명을 잊고 포식자가 됩니다. 물론 우리는 살고 발전하기 위해 땅을 일구고 일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은 착취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일은 항상 돌봄을 동반합니다. 일구고 보호하고, 일하고 돌봐야 합니다. (…)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명입니다(창세 2,15 참조). 우리를 받아주는 공동의 집을 돌보지 않고서는 물질적 수준에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가장 가난한 우리 형제들과 어머니인 지구는 우리 때문에 생긴 피해와 불의에 신음하며 다른 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회심과 방향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지구와 피조물을 돌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관상적 차원을 회복하는 것, 다시 말해 지구와 피조물은 이익을 위해 착취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선물로 보는 관점을 회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관상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나 자연 속에서 그들의 유용성보다 더 큰 것을 발견합니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곧, 관상하는 것은 사물의 유용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지구와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는 것은 그것들을 착취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관상은 무상입니다. 하느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신 내재적 가치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많은 영적 스승들이 가르친 것처럼 하늘, 땅, 바다, 모든 피조물은 이러한 상징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를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친교에로 되돌아가게 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자신의 저서 『영신수련』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랑을 얻기 위한 명상”을 수행하도록 초대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자신의 피조물들을 어떻게 바라보시고 어떻게 피조물과 함께 기뻐하는가를 고려하고, 하느님의 피조물들 속에서 그분의 현존을 발견하고, 자유와 은총으로 피조물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우리를 돌봄의 태도로 이끄는 관상은 마치 우리가 자연 속에 있지 않은 것처럼 자연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 속에 있고 자연의 일부입니다. 관상은 내면에서 시작하여 우리 자신을 피조물의 일부로 인식하고, 피조물을 단지 착취의 대상으로 대하는 무정형 현실을 바라보는 단순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만듭니다. 이런 방식으로 관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뿐만 아니라 이 아름다움의 주요 부분에 속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또한 피조물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곧, 자연과 피조물을 관상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들을 그들의 풍요로움 안에서 관상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자연을 착취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결국 사람들을 착취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취급합니다. 이것이 보편적 법칙입니다. 자연을 관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들과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형제자매들을 관상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관상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은 건강을 악화시키고 손상시키는 것을 바꾸기 위해 보다 쉽게 일할 것입니다. 새로운 생산 및 소비 습관을 교육하고 장려하며, 공동의 집에 대한 존중과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보장하는 새로운 경제 성장 모델에 기여할 것입니다. 행동하는 관상가는 환경의 수호자가 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아름답습니다! 우리 각자는 수천년에 걸친 문화에 대한 선조들의 지식과 (오늘날의) 새로운 기술 지식을 결합하여, 우리의 생활 방식이 항상 지속가능하도록, 환경과 환경의 순결함의 수호자가 돼야 합니다.

끝으로, 관상하기와 돌보기입니다. 이는 우리 인간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바로잡고 다시 균형을 찾게 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두 가지 태도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와 피조물의 관계는 마치 원수 관계인 것처럼 보입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피조물을 파괴하고 착취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이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걸 잊지 맙시다. 다음과 같은 스페인 격언을 기억합시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용서하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용서합니다.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신문에서 아문센 해 인근에 있는 남극 대륙의 두 빙하에 대한 소식을 읽었습니다. 해수면이 상승하여 많은 어려움이 생기고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끔찍한 소식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구온난화, 환경을 돌보지 않고 공동의 집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피조물과, 말하자면 상징적 의미로 “형제적”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공동의 집의 수호자, 생명의 수호자, 희망의 수호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유산을 수호하여 다음 세대가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려움을) 그냥 이렇게 이겨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개신교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말한 것처럼, 문제는 ‘오늘 우리가 (지금 처한 어려움을) 어떻게 벗어나느냐’가 아니라, ‘다음 세대의 유산과 삶은 어떨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과 손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피조물을 착취한다면 그들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겠습니까? 이 여정을 지켜 나갑시다. 그럼으로써 공동의 집의 “수호자”가 되고 생명과 희망의 수호자가 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유산을 지켜 다음 세대가 누릴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가 빚을 지고 있는 토착원주민들을 특별히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행한 피해를 보상해주기 위해 참회의 보속을 행합시다. 그리고 또한 토착원주민들의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가치와 함께 그들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운동단체들, 협회들, 시민단체들을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활동이 현실에서 언제나 인정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그룹들은 현실적으로 평화적 혁명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돌봄의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돌보기 위해 관상합시다. 우리와 피조물과 우리 자녀들 그리고 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관상합시다. 미래를 보호하기 위해 관상합시다. 돌보기 위해, 보호하기 위해, 다음 세대에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관상합시다. 

그러나 이것을 몇몇 사람들에게 위임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모든 인간의 임무입니다. 우리 각자는 피조물에 대해 하느님을 찬미하고, 피조물을 관상하며 보호할 수 있는 “공동의 집의 수호자”가 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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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9월 2020, 2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