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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자비는 평화에 새겨진 삶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빚의 탕감과 용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9월 13일 연중 제24주일 삼종기도에서 하느님의 태도와 인간의 태도를 구분하며 주님의 정의에는 자비가 스며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읽은 이른바 “자비로운 임금과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 18,21-35 참조)라는 비유에서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26, 29절)라는 청원을 2번이나 발견합니다. 첫 번째는 자기 주인에게 1만 탈렌트를 빚진 종의 청원입니다. 엄청난 돈입니다. 오늘날 수백수천만 유로에 해당할 겁니다. 두 번째는 그 주인의 다른 종의 청원입니다. 그 역시 빚을 졌지만, 주인에게 빚진 게 아니라 엄청난 빚을 졌던 그 종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빚은 아주 적었습니다. 아마 일주일치 보수와 맞먹었을 겁니다.

비유의 핵심은 더 많은 빚을 진 종에게 주인이 베푸는 탕감입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 (그 종에 대해)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27절). 그는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러니 엄청난 탕감을 받은 셈입니다! 하지만 그 종은 (빚을) 탕감 받자 마자, 그에게 적은 빚을 진 자기 동료를 매정하게 대했습니다. 그의 청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욕설하며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30절 참조). 얼마 안 되는 그 빚 때문입니다. 주인은 이를 알게 되자, 분노하여 악한 종을 불러들여 그를 단죄했습니다(32-34절 참조). “나는 너를 많이 용서해줬는데, 너는 조금 밖에 되지 않는 이것도 용서해줄 수 없단 말이냐?”

비유에서 우리는 두 가지 다른 태도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많이 탕감해준 임금을 상징하는 하느님의 태도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태도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태도에서 정의는 자비가 스며들어 있지만, 인간의 태도에서 정의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기 내어 용서의 힘에 마음을 열라고 권고하십니다. 왜냐하면 삶에서 모든 것이 정의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운 사랑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이는 오늘 비유 직전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의 바탕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질문은 이랬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21절)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성경의 상징적인 언어를 풀이하자면, 이 말씀은 우리가 항상 용서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용서와 자비가 우리 삶의 양식이 되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고통, 얼마나 많은 상처, 얼마나 많은 전쟁을 없앨 수 있었겠습니까! 가족 안에서도, 가정 안에서조차, 많은 가족이 용서할 줄 몰라 반목하며,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마음 한 켠에 원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모든 인간 관계에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 사이는 물론 부모와 자식 관계 그리고 우리 공동체 내부, 교회와 사회 및 정치 영역 전반에 걸쳐서 말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미사를 거행하던 중 제1독서인 집회서의 한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아서 잠시 생각에 머물렀습니다. 그 구절은 이러한 말씀이었죠.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집회 28,6).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종말을 생각하라! 여러분이 관 속에 들어갈 때 (...) 증오심을 가지고 가시겠습니까?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증오나) 원한을 버리십시오. 몹시 감동적인 이 문장을 생각해 봅시다.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용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평온한 순간에는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이 사람이 제게 온갖 궂은일을 겪게 했지만, 저도 그랬습니다. 용서받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게 낫죠.” 하지만 그렇게 말한 다음엔 다시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마치 여름 날 성가신 파리가 왔다가 또 돌아오고,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죠. (...) 용서하는 것은 그저 한 순간만의 일이 아니라, 자꾸 돌아오고 되살아나는 이 증오, 이러한 원한에 계속 대항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종말을 생각하고, 미워하지 맙시다.

오늘 비유 말씀은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구절의 의미를 완전히 받아들이도록 도와줍니다. 곧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라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확실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곧 종말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꾸만) 돌아오고 되돌아오는 성가신 파리 같은 증오를 몰아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용서받고 사랑받지 못할 겁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의 모성적 전구에 우리를 맡겨 드립시다. 우리가 하느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를 생각하고,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걸 기억하도록 성모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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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9월 2020, 1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