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9387320100.JPG

“타인에 대한 험담은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나쁜 전염병입니다”

회복의 교수법은 비난이나 단죄가 아니라, 형제가 잘못했을 때 예수님이 제안하신 방법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9월 6일 연중 제23주일 삼종기도에서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하라며, 그들의 결점이나 실수를 떠벌리지 말라고 권고했다. 아울러 “교회를 분열시키려 애쓰는 악마”는 말이 많은 “큰 험담꾼”이라고 말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주일 복음(마태 18,15-20 참조)은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다섯 편의 설교 중 네 번째 설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혹은 “교회” 설교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 구절은 형제를 바로잡아 주는 내용을 언급하며, 그리스도인 실존의 두 가지 차원을 성찰하도록 초대합니다. 하나는 공동체적 차원입니다. 이는 친교의 보호를 요구합니다. 말하자면 교회의 일치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개인적 차원입니다. 각자의 개인적 양심에 대한 존중과 주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형제를 바로잡아 주기 위해 ‘회복의 교수법’을 제안하십니다. 예수님의 교수법은 언제나 회복의 교수법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회복하고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이 회복의 교수법은 세 단계로 나뉩니다.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5절). 다시 말해 그의 죄를 공공연히 떠벌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형제를 바로잡아 주는 일은) 그를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깨닫도록 도와주고자 신중하게 그 형제에게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이런 경험을 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죄송하지만 당신은 이것을 잘못하신 것 같군요. 이것을 조금 고치셔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처음에 화를 낼 수 있겠지만, 나중에는 고마워하게 됩니다. 그것이 형제애, 친교, 도움, 회복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게 쉽지 않습니다. 형제나 자매가 나쁘게 반응할까 두려운 부분도 있죠. 간혹 그 형제나 자매와 충분한 신뢰가 부족한 때도 있습니다. (...) (물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참된 의미에서) 형제를 바로잡아 준다면, 우리는 이것이 정말로 주님의 길이라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나의 좋은 지향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개입이 실패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포기해버리고 “알아서 하세요. 저는 손 뗄게요”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요? 안 됩니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다른 형제자매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16절). 이 말씀은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규정입니다(신명 19,15 참조). 비록 피고인에게 불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거짓고발자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됐던 법규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 나아가십니다. 증인 두 명이 필요한데, 고발하거나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돕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당신과 내가 의견을 일치하여, 잘못을 범하고 있고 나쁜 인상을 주는 이 사람에게 말하러 갑시다. 하지만 ‘형제로서’ 그에게 말합시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회복의 태도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는 달리, 두 번째 접근방식인 이 방식도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십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둘이나 셋의 증언으로 충분히 유죄가 성립하는 데도 말입니다. 

실제로 둘이나 셋의 형제적 사랑도 충분치 않을 수 있습니다. 그 형제나 자매가 완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예수님은 “교회에 알려라”(17절), 다시 말해 교회 공동체에 알리라고 덧붙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공동체 전체가 관여합니다. 다른 형제들이 무관심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형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 또한 충분치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 이 표현은 겉보기엔 경멸적인 말투로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형제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라고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오직 아버지만이 모든 형제가 다 함께 보여주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우리를 많이 도와줍니다. 왜냐하면, 한 가지 사례를 들자면, 우리가 그 형제나 자매에게서 어떤 잘못, 결점, 실수를 발견할 때, 흔히 우리가 행하는 첫 번째 행동은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말하고 수군대곤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험담은 공동체 앞에서, 교회의 일치 앞에서 마음을 닫아겁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추한 모습을 말하러 다니는 큰 험담꾼은 바로 악마입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형제들을 떼어놓으며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도록 애쓰는 거짓말쟁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제발 부탁입니다. 험담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험담은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나쁜 전염병입니다! 우리 노력합시다. 절대 험담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세리와 이방인을 받아들이셨던 예수님의 사랑은 당대의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지없는 단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우리의 인간적인 시도가 실패할 수 있고 오직 하느님 앞에 있을 때만 그 형제를 자신의 양심과 그의 행동에 대한 책임 앞에 둘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혹시 일이 제대로 안 풀린다면, 잘못을 범한 그 형제나 자매를 위해 침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절대 험담을 해서는 안 됩니다.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 늘 상호 용서와 특히 하느님 자비의 불굴의 힘에 바탕을 둔 새로운 형제적 관계가 세워질 수 있도록, 건전한 습관으로 형제를 바로잡아 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길 빕니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06 9월 2020, 1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