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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체험... “형제들은 하느님의 선물”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형제애’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실제적 선물이다. 아시시의 가난한 성자는 우리 모두가 한 분이신 아버지의 자녀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오늘날 우리에게 전한다.

Alessandro Gisotti / 번역 이재협 신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교황명으로 선택한 교황에게 언제나 영감을 불어넣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5년 전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는 ‘태양의 찬가’로 알려진 프란치스코 성인의 ‘피조물의 찬가’에서 영감을 받아 피조물을 위해 하느님께 올린 찬미가였다. 이번에는 ‘형제애 (그리고 사회적 우애)’이다. ‘형제애’는 오는 10월 3일 성인의 도시인 아시시에서 인준 예정인 새 교황 문헌의 주제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형제들’이란 누구인가? 이에 대해 내밀하게 밝히는 성인의 대답을 그의 유언의 시작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유언에서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끄심으로 그가 역겨워 했던 나병환자들과의 만남 이후의 마음을 고백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형제들을 주셨지만 아무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거룩한 복음의 형태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형제들은 하느님의 선물과 같다. 사실대로 말하면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이었으며, 고통 없는 선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인이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도록 이끌었으며,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형제들은 우리의 ‘전리품’이 아니며, 우리가 원하고 상상했던 모습도 아닐 수 있다. 형제들은 창조주의 살아있는 작품이며, 그분의 자유로 우리 각자에게 보내주신 선물이다. 형제들은 주어지는 이들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택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다. 오직 형제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뿐이다. 그들의 약함과 다양성까지도 말이다. 그 차이(혹은 가끔은 불협화음)는 결국 주님만이 조화롭게 하실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던 것처럼 “조화는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명확히 드러나고 그의 지상여정의 마지막 유언에서 확인되는 것이 ‘형제애’다. 성인에게 형제애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 사건이며 인생을 변화시킨 체험이다. 이 사실과 함께, 그 출처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이 사실과 함께,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한 자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있어서 형제애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에서 드러난 시각의 새로움은 성인을 이집트 술탄과의 유명한 만남 안에서 놀라운 선택으로 이끌었다. 여기에 아시시 성인의 회심의 핵심이 있다. 우리는 성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만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공통된 사랑의 계획을 깨닫지 못하면 형제가 될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도(친형제자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벨을 죽인 이는 친형이었다. 카인은 자신의 눈을 닫아버린 미움 때문에 동생을 살해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는 동생조차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형제애’는 ‘정적인’ 선물, 곧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형제애는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커진다. 그리고 언제나 평화를 가져다준다. 형제들과의 관계는 ‘길’, 곧 ‘친교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시작하는 길’을 걷는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프란치스코 성인으로 하여금 그의 형제들과의 만남을 겪고 난 뒤 그에게 보여주셨다. 나아가 그는 복음을 따라 사는 차원을 넘어 복음과 자신을 일치시켰으며 거룩한 복음이 지닌 그 형태를 취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근본적인 방법으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살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애용하는 적절한 표현인 ‘진정제 없는’ 모습으로 살았다. 

이탈리아의 주보 성인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다른 이를 자기 자신처럼 돌보는 것은 복음선포를 위한 길이며 특별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한 형제가 고립된 상황에 놓여 있을 수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모순이고, 증거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성인에게 있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커질수록 형제들을 향한 사랑도 커졌으며, 그 형제들의 얼굴에는 하느님의 얼굴이 있었다. 프란치스코 성인 안에서 사랑은 우주적 사랑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형제애는 모든 피조물을 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태양을 형제로, 달을 자매로 불렀다. 8세기가 지난 지금, 이기주의가 불어나고 갖가지 형태의 장벽이 세워지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은 형제애와 아버지의 사랑에 목마르다. 세상은 이것들을 끊임없이 찾고 있다. 모든 사람을 형제로 맞아들이고자 했던 아시시의 가난한 성자의 증언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네며, 또 다른 한 명의 프란치스코(교황)와 함께 형제애의 길을 함께 걷자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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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9월 2020, 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