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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우리를 자아도취, 피해망상, 비관주의에서 치유하소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31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교황은 성령이 교회를 “소극적이고 조심조심하는 신앙의 울타리를 넘어서도록” 부추긴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자아도취(나르시시즘), 피해망상, 비관주의가 선물의 원수라고 설명하면서, 코로나19 대유행의 위기보다 더 나쁘다고 지적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자신 안에 스스로를 가두면서 신앙을 소모시킬 뿐”이다.

번역 이창욱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1코린 12,4).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5-6절). 다양성과 단일성입니다. 성 바오로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단어를 함께 배치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성령이 ‘다양한 것들’을 함께 일치시키는 ‘한 분’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교회 역시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우리가 같은 성령에 의해 하나로 일치된 것입니다.

교회의 시초, 오순절로 거슬러 가봅시다. (그 자리에 모인) 사도들을 바라봅시다. 그들 가운데에는 어부들처럼 자기 손으로 노동하며 살아가던 단순한 사람들이 있었고, 세리(세금 징수 관리)였던 마태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다양한 사회적 배경에서 온 사람들, 곧 히브리인들과 그리스인들, 온유한 사람들과 사나운 사람들, 서로 다른 비전과 감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두 (서로) 달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변화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종의 모델로 삼기 위해 그들을 획일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다양성을 그냥 놓아두셨습니다. 이제 그들을 성령으로 도유하십니다. 일치,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가 도유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은 성령의 일치시키는 힘을 깨닫습니다. 비록 모두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유일한 백성, 곧 성령이 빚어낸 하느님 백성을 이룰 때, 그들의 눈으로 직접 그 힘을 봅니다. 성령은 우리의 다양성을 통해 일치를 이루시고 조화를 선사하는 분이십니다. 성령 안에 조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 자체가 조화이십니다.

우리를 되돌아봅시다. 오늘날의 교회 말입니다. 이렇게 자문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일치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일치의 토대는 무엇인가?” 우리 사이에도 다양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양한 견해, 다양한 선택, 다양한 감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을 지독하게 고수하면서, 그것이 모든 이를 위해 좋은 것이라고 믿으며, 오직 우리처럼 생각하는 사람과 화합을 이루려는 유혹이 항상 존재합니다. 이런 행동은 분열을 일으키는 나쁜 유혹입니다. 이런 것은 성령이 원하시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신앙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과 동일한 그것이 우리를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실천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곧, 우리를 일치시키는 기본 원칙은 성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무엇보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떠올려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동등하고, (동시에) 모두가 다릅니다. 성령은 우리가 유일한 주님이신 예수님, 유일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음을 말하시려고, 우리의 모든 다양성과 비참을 통해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가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다시 출발합시다. 세상이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라, 성령이 바라보는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봅시다. 세상은 우리를 좌와 우로 (갈라놓고) 봅니다. 이러한 이념, 저러한 이념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면) 성령은 우리를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람으로 보십니다. 세상은 보수와 진보로 봅니다. (반면) 성령은 하느님의 자녀로 보십니다. 세상의 시선은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낳는 구조를 봅니다. (반면) 영적인 눈길은 자비를 간절히 바라는 형제자매들을 봅니다. 성령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 안에 우리의 자리를 아십니다. 성령에게 우리는 바람에 날려온 색종이 조각이 아니라, (최종 완성을 위한) 모자이크 벽화를 이루는 대체할 수 없는 조각입니다. 

오순절의 그날로 돌아가면, 우리는 교회의 첫 번째 활동을 발견합니다. 곧 선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도들이 아무런 전략을 준비하지 못했음을 봅니다. 그들은 이층 다락방에 갇혀있을 때, 전략을 짜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목적인 계획을, 그 초안을 짜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다양한 출신 배경에 따라 여러 그룹으로 나누고, 제일 먼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런 다음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해 나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 혹은 선포하기에 앞서 조금 기다린 다음, 예수님의 가르침을 심화하면서 당면한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둥지를 트는 것”에 맛들이는 다락방, 그러니까 폐쇄된 집단에서 스승에 대한 기억이 자라나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감염될 수 있는 나쁜 질병입니다. 곧, 교회가 ‘둥지’라는 생각입니다. (이에 따르면) 교회는 공동체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닙니다. (하지만) 성령은 (교회의) 문을 열고, 다시 시작하며, 이미 말하고 이미 행한 것을 넘어서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성령은 소극적이고 조심조심하는 신앙의 울타리를 넘어서도록 부추깁니다. 이 세상에서, 정교하게 정리되지 않거나 잘 짜이지 않은 전략은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반면 교회 안에서 성령은 선포하는 이에게 일치를 보장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비록 준비되지는 않았지만, 목숨을 걸고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오직 한 가지 열망만이 그들을 북돋웠습니다. 곧, 그들이 ‘받았던 것을 내어 준다’는 열망입니다. 요한 1서의 첫 부분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보고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합니다”(1요한 1,3 참조). 

마침내 우리는 일치의 비결, 성령의 비밀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치의 비결, 성령의 비밀이란 ‘선물’입니다. 성령은 선물이시기 때문에, 스스로를 내어주면서 살아가시고,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함께 있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선물을 나눌 수 있게 하십니다. 하느님이 선물이심을 믿는 게 중요합니다. 그분은 가로채시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내어주심으로써 활동하십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왜냐하면 우리의 신자됨의 방식이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듣는 방식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것을 가로채시고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시는 하느님을 머릿속에 상상한다면, 우리 또한 (타인의 것을) 가로채고 (타인에게) 명령을 내리고 싶어할 것입니다. 곧, 자리를 차지하고,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권력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물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마음에 간직한다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받을 자격조차 없는데도 하느님이 주시는 무상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 또한 우리의 삶 자체를 선물로 만들고 싶어할 것입니다. 아울러 겸손하게 사랑하고, 기쁨에 넘쳐 무상으로 봉사하며, 세상에 하느님의 참된 모습을 제시할 것입니다. 교회의 살아있는 기억인 성령은 우리가 선물로 태어났고 우리 자신을 내어주며 성장한다는 것을 떠올려 주십니다. 우리 자신을 보존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겁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내면을 바라보고, 무엇이 우리 자신을 내어주지 못하도록 가로막는지 자문해봅시다. 말하자면, 선물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원수를 두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우리 마음의 문 앞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곧, 자아도취(나르시시즘), 피해망상, 비관주의입니다. 먼저 자아도취는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선호합니다. 자아도취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삶은 아름다워. 내가 이득을 취한다면 말이야.”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왜 내가 나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 주어야 하는가?” 코로나19 대유행의 시기에, 자아도취가 얼마나 나쁜지요!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생각하고, 타인이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나약함과 자신의 잘못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원수인 피해망상도 위험합니다. 피해망상자는 매일 이웃에 대해 불평합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아!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 모두가 내게 앙심을 품고 있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런 불평을 듣습니까!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닫고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내어주지 않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피해망상은 얼마나 나쁜지요! 아무도 우리를 이해하지 않으며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을 겪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피해망상입니다. 끝으로 비관주의가 있습니다. 여기에 (그들이) 매일 되풀이하는 넋두리가 있습니다. “잘 되어가는 게 아무것도 없어. 사회도, 정치도, 교회도, (...)” 비관론자는 세상을 분노로 대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한 상태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어준다는 게 무슨 쓸모가 있는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그래서 다시 시작하려고 큰 노력을 기울일 때도, 비관주의는 아주 해롭습니다. 모든 것을 어둡게 보고, 아무것도 더 이상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되뇝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희망은 분명히 돌아오지 못합니다. 이 세 가지, 곧 자아도취자가 자기 자신을 비춘 거울을 보며 우상으로 섬기는 ‘거울이라는 신’, “나는 불평할 때만 인간이라고 느낀다”고 말하는 ‘불평이라는 신’, “모든 것이 어둡고, 미래도 암울하다”고 보는 ‘비관이라는 신’ 등에게서 우리는 ‘희망의 기근’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선물, 곧 우리 각자가 선물이라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자아도취, 피해망상, 비관주의에서 치유하시고, 거울, 불평, 어둠과 암울에서 우리를 낫게 하시는 하느님의 선물, 성령이 필요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기억이신 성령님, 저희 안에 받았던 선물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주소서. 이기주의의 마비상태에서 저희를 해방시키시고, 저희 안에 봉사와 선행의 열망을 지펴 주소서. 우리 자신 안에 갇혀 그저 신앙을 소모시키는 상황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이 위기보다 더 나쁘기 때문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당신은 조화를 이루시는 분이시니, 저희를 일치의 건설자가 되게 하소서. 당신은 언제나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이시니, 우리 자신에게서 나가는 용기와, 한 가족이 되기 위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주는 용기를 저희에게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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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5월 2020, 0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