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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십자고상, 복음서와 함께 성삼일을 보냅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월 8일 오전 교황청 사도궁 도서관에서 인터넷 생중계로 수요 일반알현을 진행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전례 예식을 “위대한 가정 전례”처럼 지낼 것을 신자들에게 권고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세상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하는 코로나19 판데믹 때문에, 최근 몇 주 동안 걱정하며 지낸 우리에게 하는 많은 질문 중에는 하느님에 대한 질문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 앞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갈 때 어디에 계시는가? 왜 빨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가?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하느님에 관해 묻는 질문들입니다. 

이번 성주간에 우리와 동행하는 예수님의 수난 사화는 우리에게 도움을 줍니다. 사실 그때도 많은 질문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호하고 환영한 다음, 마침내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원수들에게서 해방시켜 주실 것인지 알고 싶었습니다(루카 24,21 참조). 그들은 칼로 승리를 거두는 강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심과 자비를 바라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메시아가 왔습니다. 처음에 호산나를 외치던 바로 그 군중들이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3)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혼란스럽고 두려운 나머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운명이 이것이라면,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강하시고, 무적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 사화를 계속 읽어 나가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이 숨을 거두셨을 때,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이방인이자 로마인이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으신 것을 보았고,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들었고, 조건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그는 그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이) 참으로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하느님의 참 얼굴은 무엇인가? 보통 우리는 하느님에게 우리 자신을, 그러니까 우리의 성공, 우리의 정의 의식, 우리의 분노 등을 최대한 투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느님이 그렇지 않으시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런 것과는 다르신 분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오셨습니다.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바로 파스카를 통해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어디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까? 십자가 위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 얼굴의 특징들을 배웁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는 하느님의 옥좌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침묵 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바라보고, 우리 주님이 누구신지 보는 게 우리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그분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으시며, 모두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신 게 아닙니다. 그분은 아무 말없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우리를 낯선 사람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을 당신 것으로 취하시며, 우리의 죄를 당신이 짊어지십니다. 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편견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분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복음서를 펼칩시다. 우리 모두 집안에 머물면서, 자가격리를 행하고 있는 이 시기에, 이 두 가지를 손에 듭시다. 십자고상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복음서를 펼칩시다. 이는 요즘 성당에 갈 수 없는 우리에게, 말하자면 위대한 가정 전례와 같습니다. 십자고상과 복음서입니다!

복음에서 군중들은 예컨대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 있은 후에 예수님에게 가서 그분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정작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셨다는 걸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요한 6,15 참조). 마귀가 예수님의 거룩하신 권위를 드러내고자 했을 때, 예수님은 마귀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으십니다(마르 1,24-25 참조).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은 오해받길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이 겸손한 사랑이신 참 하느님을, 과시하고 힘으로 강요하는 거짓 신이나 세상의 신과 혼동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상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처럼 사람이 되신 분이십니다. 당신의 신성의 힘으로 인간처럼 당신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복음 안에서 언제 장엄하게 선포되었습니까?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고 말했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자 곧바로 그곳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우리가 잘못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랑 안에서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분의 본성입니다. 그분은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약하고 죽어버린 신과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저는 힘있고 강한 신이 좋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권력은 지나가고 사랑이 남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지켜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의 나약함을 감싸주고 변화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분의 용서를 통해 우리의 죄를 치유합니다. 파스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은 죽음을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고, 우리의 두려움을 신뢰로 바뀌게 하고, 우리의 고뇌를 희망으로 바뀌게 했습니다. 파스카는 하느님이 모든 것을 선하게 돌릴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이는 환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환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파스카 아침에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28,5 참조)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악에 관한 고뇌에 찬 질문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부활하신 분 안에서, 난파를 피할 수 있는 견고한 기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와 가까워지면서 역사를 변화시키셨습니다. 비록 역사가 여전히 악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예수님은 구원의 역사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바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열린 마음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각자에게 가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받아들이면서, 우리 역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번 한 주간 동안 십자고상과 복음서로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온 마음을 엽시다. 십자고상과 복음서를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가정 전례입니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께 우리의 온 마음을 엽시다. 그분의 시선이 우리 위에 머무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깁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생각과 함께 여러분이 성주간과 부활절을 잘 보내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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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4월 2020, 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