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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보기 위해선 마음의 속임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코로나19 판데믹에 따른 조치로 4월 1일 오전 교황청 사도궁 도서관에서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진행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은 여섯 번째 ‘참행복’에 대한 내용이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하는, 그러기 위한 조건으로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여섯 번째 ‘참행복’을 함께 살펴봅시다.

시편은 말합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시편 27,8-9).

이 말씀은 하느님과의 기계적이거나 모호한 관계가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갈망을 나타냅니다. 욥기에서 진실된 관계의 표징으로 말하고 있는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욥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저는 이것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삶의 여정이라고 자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귀로만 들어서 알고 있지만,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아가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앞으로 말입니다.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하느님을 직접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실하다면 말입니다. (…)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성숙입니다. 

어떻게 이 내밀함에 도달하고, 눈으로 하느님을 뵐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엠마오의 제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주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루카 24,16 참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고 야단치시는 것을 시작으로, 빵을 쪼개는 데서 정점에 이르는 (엠마오로 가는) 여정의 말미에 주님께서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야단치십니다. 그들의 보지 못함의 시원은 바로 그들의 어리석고 둔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어리석고 둔하면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흐리게 보입니다. 여기에 이 여섯 번째 ‘참행복’의 지혜가 있습니다. 이를 묵상하기 위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당신께서는 제 가장 내밀한 데보다 더 내밀하게 계셨고 (...)”(“interior intimo meo”,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성염 옮김, 제3권, 6.11 참조)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우리 내면으로 들어가고,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하느님을 보려고 안경이나 관측점을 바꾸거나, 방법을 가르쳐주는 신학자들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을 속임수에서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이 길이 유일한 길입니다. 

결정적인 성숙은 우리의 가장 큰 적이 종종 우리의 마음 내면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입니다. 가장 고귀한 싸움은 우리의 죄를 낳는 내적 속임수들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내적 비전을 변화시키고, 사물에 대한 평가를 바꾸고, 사실이 아닌 것들, 혹은 적어도 그렇지 않은 것들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깨끗함”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이 단순히 감정으로만 구성된 게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내밀한 장소이자,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는 내적 공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3)고 말합니다. 이 “빛”은 마음의 시선이며, 현실을 읽을 수 있는 관점이자 종합이며 시점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43항 참조).

그렇다면 “깨끗한” 마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깨끗한 마음은, 마음의 내면에 주님과의 관계에 합당한 것을 간직하면서, 주님의 현존 안에서 삽니다.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통일되고”, 일관적이고, 모호하지 않고, 단순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화된 마음은 해방과 포기가 수반된 과정의 결과입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그냥 생겨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악을 거부하는 것을 배우면서 내적인 단순함을 경험함으로써 생겨납니다. 성경은 이를 마음의 할례라고 합니다(신명 10,16; 30,6; 에제 44,9; 예레 4,4 참조). 

이 내적 정화는 악의 영향을 받는 마음의 한 부분에 대한 깨달음을 수반합니다. “신부님께서 아시는 것처럼, 저는 이렇게 느끼고,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봅니다. 이것은 나쁩니다.” 항상 성령의 가르침과 이끄심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선 악 때문에 흐려진 나쁜 일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픈 마음, 죄 많은 마음, 죄 중에 있기 때문에 사물을 잘 볼 수 없는 마음에서, 빛이 충만한 마음으로 가는 여정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여정에 이르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마음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것”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여섯 번째 행복의 비전 안에는, 다른 모든 ‘참행복’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미래의, 종말론적 차원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향하고 있는 하늘나라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 안에서 하느님 섭리의 계획을 이해하고, 성사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형제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하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곳에서 그분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19항 참조).

이 여섯 번째 ‘참행복’은 어느정도는 그 이전의 ‘참행복’들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선에 대한 갈망에 귀를 기울이고,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평생 지속되며 하늘나라로 이어지는 해방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심오한 일입니다. 이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께 자리를 내어 드리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 자신을 열어 드린다면 말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 인생의 시련과 정화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업, 하느님과 성령의 이 사업이 큰 기쁨과 진정한 평화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우리를 완전한 기쁨으로 향하게 하는 이 여정으로 인도되도록, 우리 마음의 문을 성령께 열어젖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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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4월 2020,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