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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평온이 아니라 ‘항상 어떤 경우에도’ 화해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열매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란 “항상 새롭게 사랑하는 방식”을 고안함으로써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을 통해, 가장 활동적이며 창의적이라고 정의한 일곱 번째 복음적 “참행복”에 대해 설명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참행복’에 대한 교리 교육

8.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교리 교육은 일곱 번째 ‘참행복’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주제가 부활절을 지낸 바로 다음에 다룰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방금 우리가)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서 들은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평화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곱 번째 ‘참행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잘못 이해되거나 때론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평화”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에 대한 두 가지 의미를 살펴봐야 합니다. 첫 번째는 성경적 의미로 풍요로움, 번영, 평안이라는 뜻을 지닌 아름다운 단어 ‘샬롬(shalòm)’으로 표현되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이라고 인사하는 것은 아름답고 충만하며 번영하는 삶을 기원하는 것이지만, 또한 평화의 임금이신 메시아 안에서 완성될 진리와 정의로운 삶을 바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이사 9,6; 미카 5,4-5 참조).

두 번째 의미는 “평화”라는 단어의 일반적인 뜻으로, 일종의 내적 평온함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나는 평온하다.’ ‘나는 평화롭다’와 같은 것입니다. 이는 현대적이고 심리적이며 주관적인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평화를 고요한 것, 조화로운 것, 내적인 균형 등으로 많이들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평화”라는 단어의 의미는 불완전하며, 절대화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안한 삶은 성장의 중요한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주님 스스로 우리 안에 불안을 심어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만나러 가고, 당신을 찾아가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불안은) 성장의 중요한 순간입니다. 반면 내적 평온함은 길들여진 양심과 관계하면서, 참된 영적 구원에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의 거짓된 안전들을 뒤흔들어 놓으심으로써 자주 “반대의 표징”(루카 2,34-35)이 되셔야 했습니다. 평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주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길 위에 우리를 놓아두십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주님이 당신의 평화를 인간의 평화, 세상의 평화와 다르게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릅니다.

우리 스스로 자문해봅시다. 세상은 어떻게 평화를 주는가? 무력충돌을 생각해 봅시다. 전쟁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끝납니다. 두 당사국 중 한쪽의 패배로 끝나거나, 서로 간의 평화조약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두 번째 방법으로 들어설 수 있도록 희망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는 전쟁으로 혹은 다른 방식이나 다른 장소에서 동일한 전쟁의 변형에 의해 철회된 수많은 평화 조약들이 역사를 이룬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여러 가지 배경과 다른 방식으로 “국지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이탈리아 레디풀리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 묘지에서의 강론, 2014.9.13; 사라예보 강론, 2015.6.6; 교황청 교회법평의회 연설, 2020.2.2.1 참조). 우리는 적어도 모든 경제적 혹은 금융적 이익에 따른 세계화의 맥락 안에서 일부의 “평화”가 다른 사람들의 “전쟁”에 해당한다고 의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닙니다! 

반면, 주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의 “평화”를 주십니까?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평화란 “둘을 하나로 만들고”(에페 2,14 참조), 적의를 없애고, 화해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평화의 사업을 성취하는 길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다른 서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를 통해 평화를 이룩하시고 만물을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참조).  

이 시점에서 물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물어봅시다. 그렇다면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일곱 번째 ‘참행복’은 가장 활동적이고, 분명 역동적입니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창조 활동을 위한 성경의 첫 구절에 사용된 표현과 유사하며 주도권과 부지런함을 가리킵니다. 하느님 당신 피조물을 향한 사랑은 창의적이며 - 사랑은 항상 창의적입니다 - ,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화해를 추구합니다. 평화의 예술을 배우고 행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선물 없이는 화해가 없으며, 항상 어떤 경우에도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항상 어떤 경우에도 말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평화는 이런 식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의 열매인 자율적인 일이 아닙니다. 반면, 이것은 우리의 평화이시며,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의 표현입니다. 

참된 샬롬과 참된 내적 균형은 그리스도의 평화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분의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의 무리 안에서 구현된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냅니다. 성인 성녀들은 새롭게 사랑하는 방식을 고안해내며 창의적이고 독창적입니다. 성인 성녀들은 평화를 건설합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를 통해 형제들을 찾아 나서는 하느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삶은  참된 행복입니다. 이 길을 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다시 한 번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서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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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4월 2020, 1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