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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사순 시기 동안 TV와 휴대폰에서 멀어집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월 26일 재의 수요일 오전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네트워크에 의해 증폭되는 “너무나 많은 언어 폭력”에 오염돼 있으므로, 복음과 친숙해지고, 주님을 “당신”이라고 부르고, 건전한 “마음의 생태학”에 전념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사순 시기: 광야로 들어가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파스카를 향한 40일의 여정이자, 전례 주년(典禮周年)과 신앙의 중심을 향한 사순 시기 여정이 시작됩니다. 이 여정은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광야에 들어가시어, 40일 동안 기도와 단식을 하시며 악마의 유혹을 받으신 여정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은 광야의 영적 의미에 대해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영적으로 광야는 무엇을 뜻합니까? 도시에 사는 우리에게 광야는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광야에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첫 느낌은 우리가 큰 침묵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 소리와 우리의 숨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광야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소음에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또 다른 말씀, 곧 우리의 마음을 쓰다듬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와 같은(1열왕 19,12 참조) 하느님 말씀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소리는 없습니다. 사실, 성경을 살펴보면 주님은 광야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열 개의 말씀” 곧,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 백성이 불충실한 신부처럼 당신에게서 멀어지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 거기에서 그 여자는 젊을 때처럼, (...) 응답하리라”(호세 2,16-17). 광야에서 우리는 부드러운 소리와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열왕기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울려 퍼지는 침묵의 소리와 같다고 말합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친밀함과 주님의 사랑을 다시 찾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려고 외딴곳에 가시는 걸 좋아하셨습니다(루카 5,16 참조). 예수님은 우리에게 침묵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내적으로 침묵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 말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순 시기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리를 내어주는 데 적절한 시기입니다. TV를 끄고 성경을 펼치는 시기입니다. 휴대폰을 끄고 복음과 친숙해져야 하는 시기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TV가 없었지만, 대신 (사순 시기 동안) 라디오를 듣지 않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사순 시기는 휴대폰을 끄고 복음과 친숙해지기 위한 광야이며, 끊어버리는 시기입니다. 사순 시기는 불필요한 말, 잡담, 소문, 험담들을 끊어 버리고, 주님께 “당신”이라고 부르며, 주님과 대화하는 시기입니다. 건전한 “마음의 생태학”에 전념하고, 마음을 청소하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네트워크가 증폭시키는” “너무나 많은 언어 폭력”과 수많은 공격적이고 해로운 말로 오염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쉽게 (타인에게) 모욕을 줍니다. 우리는 빈말, 광고, 사람을 속이는 메시지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을 듣는데 익숙해졌으며, 우리의 마음을 위축시키는 세속성에 빠질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다. 이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침묵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양심의 목소리인지, 어떤 것이 선한 말인지를 구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우리를 부르시면서 가치 있는 것, 중요한 것, 본질적인 것에 귀를 기울이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유혹하는 악마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우리에게 필요한) 빵처럼, 뿐만 아니라 그러한 빵보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필요하며,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곧,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느님 앞에서만 (세상에) 기울어진 마음이 밝혀지고, 영혼의 이중성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 아닌 생명의 공간인 광야입니다. 왜냐하면 침묵 안에서 나누는 주님과의 대화가 우리에게 생명을 다시 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광야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광야는 본질적인 공간입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봅시다. 얼마나 많은 쓸모 없는 것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수많은 것들을 뒤쫓습니다. 가치 있는 것을 재발견하고, 우리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찾기 위해 너무 많은 불필요한 것들에서 해방되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일 것입니다. 단식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으로 가기 위해 헛된 것을 포기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단식하는 것은 한낱 다이어트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단식하는 것은 근본적인 것으로 가는 것이며, 더 소박한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광야는 고독의 공간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근처에는 많은 광야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혼자 외롭게 버려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노인들이, 침묵 가운데 소리 내지 않고 소외되고 버려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무도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목소리 내지 못하도록 강요당하고 우리의 도움을 구하는 그들에게로 우리를 이끕니다. 소리 없는 많은 시선들이 우리의 도움을 구합니다. 사순 시기의 광야의 여정은 더 약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여정입니다.

기도, 단식, 자비의 행동. 이것이 바로 사순 시기 광야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 나는 광야에 길을 열 것이다”(이사 43,19)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광야에서 열립니다. 예수님과 함께 광야로 들어갑시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파스카와 하느님 사랑의 권능을 맛보면서 광야에서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무(無)에서” 새싹과 식물의 싹을 틔우면서, 봄에 꽃을 피우는 광야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사순 시기의 광야로 들어갑시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광야들도 꽃을 피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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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월 2020, 0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