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 전교 주일 강론 “형제들을 가려서 선택하지 말고 받아들이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20일 제93차 전교 주일을 맞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한 미사 강론을 통해 선교란 “견뎌야 하는 짐이 아니라 봉헌해야 할 선물”이라면서, 사랑으로 모든 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번역 이창욱

우리가 방금 들은 독서에서 세 단어를 택하고 싶습니다. 각각 명사, 동사, 형용사입니다. (먼저) 명사는 ‘(그) 산(il monte)’이라는 단어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하면서 말했던,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드는 주님의 산입니다(이사 2,2 참조). 우리는 산에 대한 언급을 복음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다시 만날 장소로 갈릴래아의 산을 언급하십니다.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로 붐비는 갈릴래아,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 참조)의 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산은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에게 약속하신 장소로 보입니다. 산은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듯, 시나이 산에서 가르멜 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우리와 만나시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참행복을 선포하셨고, 타보르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으며, 해골산 골고타에서 생명을 내어주셨고, 올리브 산에서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큰 만남의 장소인 산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며 시간을 보내신 곳이기도 합니다. 땅과 하늘을 일치시키시려고, 당신의 형제들인 우리를 아버지와 일치시키시려고 말입니다(마르 6,46 참조).

우리에게 산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하느님과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깎아 내리는 험담과 잡담에서 거리를 두면서, 침묵과 기도 안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산에서는 다른 전망도 보입니다. 모든 이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전망입니다. 높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한꺼번에 보입니다. (높은 곳에서 볼 때) 조화로운 아름다움이란 오직 함께 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산은 형제자매를 가려서 선택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들을 바라보면서 특별히 삶을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산은 유일한 포옹, 곧 기도의 포옹 안에서 하느님과 형제들을 일치시킵니다. 산은 우리를 높은 곳으로 이끕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물질적인 것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곳으로 이끕니다. 본질적인 것을 되찾도록, 다시 말해 영원히 남는 것, 곧 하느님과 형제들을 되찾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선교는 산 위에서 시작됩니다. 바로 거기서 중요한 것이 발견됩니다. 전교의 달을 지내면서 이렇게 자문해봅시다. ‘내 인생의 정점은 무엇인가? 내가 올라야 할 그 꼭대기는 무엇인가?’

명사인 산을 동반하는 동사가 있습니다. 곧 ‘오르다(salire)’는 동사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우리를 격려합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이사 2,3). 우리는 땅에 서 있기 위해, 평범한 것에 만족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하느님과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서 ‘탈출(esodo, exodus)’하기 위해서는 수평적인 삶을 포기하고, 이기주의라는 중력에 저항해야 합니다. 따라서 올라간다는 것은 힘든 노고의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모든 것을 더 잘 보기 위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마치 산에 갈 때 오직 정상에서만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항상 올라가는 길을 통하지 않는다면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산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가면 잘 올라갈 수 없는 것처럼, 인생에서도 필요 없는 것을 비워서 가벼워져야 합니다. 이는 선교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떠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고, ‘선포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합니다. 믿을 만한 선포는 미사여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으로 이루어집니다. 곧, 우리 마음을 옹졸하고 무관심하게 만들며 자기 자신 안에 가두는 수많은 물질적인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섬김(봉사)의 삶입니다. 마음을 사로잡는 무익한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과 타인을 위한 시간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자문해봅시다. ‘나는 올라가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나는 주님의 산으로 오르기 위해 무겁고 무익한 세속적인 짐들을 포기할 줄 아는가? (불필요한 짐을 버리고) 오르는 길인가 아니면 (세속적인 무거운 짐을 안고) 기어오르는 길인가?’

만일 산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 곧 하느님과 형제들을 떠올리고, ‘올라가다’는 동사가 ‘도착하다’는 동사와 동일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면, 세 번째 단어는 오늘 가장 강력하게 들립니다. 그것은 형용사 ‘모든(tutti)’입니다. 이 단어는 전례 독서 전체에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이사 2,2)이라고 말합니다. 시편에도 “모든 민족들”이 반복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라고 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고 요구하십니다(마태 28,19). 주님께서는 이 ‘모든’을 집요하게 되풀이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나의 것”과 “우리 것”을 고집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나의 것들, 우리 사람들, 우리 공동체 (...) 그런데 그분께서는 “모든”을 지치지 않고 되풀이하십니다. 아무도 그분의 마음, 그분의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기에, ‘모든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인간적인 관점을 넘어서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이기주의에 토대를 둔 특혜(particularism, 특수주의, 자기 중심주의)’를 넘어서기에, ‘모든 (것)’입니다. 각자가 소중한 보물이고 삶의 의미란 타인에게 이 보물을 선사하는 것이기에, ‘모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모든 이의 선물로 내어 주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것과 내려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움직이고, 바깥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사용하신 명령법은 사실 ‘너희는 가서 (…)’입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가? 나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다만) 나의 일을 하는가?’ 모든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일을 (대신) 해주기를 기다리지만,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향해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증거자는 결코 타인이 알아주는 것을 담보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담보로 합니다. 예수님의 증거자는 오로지 자기 사람들, 자기 단체 구성원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만나러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증언할 기회를 잃지 마라!”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오로지 여러분만이 할 수 있는 증거를 여러분에게서 기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이 세상에 건네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그 메시지, 그 말씀이 무엇인지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기를 빕니다. (...) 그렇게 할 때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중한 사명에서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24항).

모든 이에게 가기 위해 주님께서는 어떤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십니까? 한 가지뿐입니다. 아주 단순하죠. 곧 ‘제자로 삼아라(fate discepoli)’입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그분의’ 제자이지, 우리의 제자로 삼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오로지 그분의 제자로 살아갈 때 제대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아울러 제자는 매일 스승을 따르고 제자됨의 기쁨을 타인과 나눕니다. 정복하고, 강요하며, 개종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증거하면서’, 제자 대 제자로, 겸손하게 다른 제자들과 나란히, 우리가 받았던 그 사랑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곧 세상의 오염에 잠긴 사람들에게 순수하고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산 위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우리를 기쁨으로 채워주는 그 평화를 지상에 가져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시고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신다는 우리의 말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각자는 하나의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각자는 “이 땅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73항). 우리는 여기에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증거하고, 찬미하며, 위로하고, 다시 일으키며, 전하기 위해 있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사랑 받는 자녀임을, 생명과 성령을 주신 형제임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을 걱정하십니다. 예수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습니까? 사랑을 갖고 모든 이에게 가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하나의 소중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견뎌야 하는 짐이 아니라, 봉헌해야 할 선물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두려움 없이, 모든 이를 향해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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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0월 2019, 1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