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성인들도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 중에 “주님의 기도”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면서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부분을 해설했다. 우리는 죄인이다. 왜냐하면 “삶은 은총”이기 때문이고,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기 때문이다.

번역 김호열 신부

“주님의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12.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성인들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날씨가 별로 좋지 않지만, 그래도 ‘좋은 하루(buongiorno)’입니다!

하느님께 일용할 양식(빵)을 청한 후에, “주님의 기도”는 타인들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청하라고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마태 6,12). 우리에게 양식(빵)이 필요한 것처럼, 용서도 필요합니다. 용서도 매일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자기가 진 빚의 탕감을 청합니다. 곧, 자신의 죄와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실에 대해 용서를 청하는 거죠. 이것이 바로 모든 기도의 첫 번째 진리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라거나, 선한 삶에서 결코 벗어난 일이 없는 순수한 성인들이든지 간에, 우리 모두는 항상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는 자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이는 항상 하느님과 계산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 앞에 서있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고 믿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칭찬하고 있는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주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자신이 완벽하다고 느끼면서 타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반면, 성전 뒤쪽에 멀찍이 서있는 세리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무시당했으며, 성전 문지방에 멈춰 서서 성전에 들어갈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고, 곧 용서받고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세리는 교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신의 한계와 죄를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죄와 보이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소음을 일으키며 눈에 띄는 죄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마음속에 숨어있는 은밀한 죄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최악은 신실한 신앙 생활을 한다는 사람들도 감염될 수 있는 ‘오만함’입니다. (일화 하나를 소개해드리자면) 오래전인 1600-1700년대, 얀세니즘이 활발하던 시기에 유명한 수녀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수녀원의 수녀들이 완벽하고 천사들처럼 순수하다고 말했습니다만, 사실 그 수녀들은 악마들처럼 오만했습니다. 이는 좋지 않은 것입니다. 죄는 형제애를 분열시키고, 스스로를 남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며, (결국) 스스로를 하느님과 같다고 믿게 만드니까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전의 세리처럼 가슴을 쳐야 할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성 요한은 첫 번째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1요한 1,8). 만약 여러분이 자신을 속이고 싶으시다면 여러분이 죄가 없다고 말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빚쟁이들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우리들은 이 세상 삶에서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실존, 아버지와 어머니, 우정, 피조물의 경이로움 (…) 등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힘든 시기를 겪는다 할지라도, 우리 삶은 은총이고, 무(無)에서 창조하신 하느님의 기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합니다.

우리가 빚쟁이들이라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사랑에 성공하더라도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제 힘만으로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의 빛으로 빛을 발하지 않습니다. 고대 신학자들이 말했던 “달의 신비(mysterium lunae)”는 교회의 정체성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역사에도 해당됩니다. 이러한 “달의 신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대신 태양의 빛을 반사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 스스로는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빛은 하느님의 빛과 은총의 반영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 곁의 누군가가 여러분이 어렸을 때 여러분에게 미소짓고 이에 미소로 응답하라고 알려줬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 곁의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사랑을 일깨웠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면서 말이죠.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수감자,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 마약 복용자 (…) 등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우리는 인생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개인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여러분은 때때로 자신의 실수에 대해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만 책임을 져야 하는지, 혹은 누군가의 증오와 저버림의 역사 때문인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지요?

이것이 바로 “달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합니다. 누군가 (먼저) 태양의 빛을 받지 않는다면, 겨울철 땅처럼 얼어붙을 것입니다.

우리를 앞서가는 사랑의 연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섭리적 현존을 어떻게 인식하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만큼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불균형을 깨닫기 위해서는 십자고상 앞에 서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항상 우리를 먼저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 가운데 가장 거룩하다는 사람들조차 당신께 빚지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오, 아버지,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10 4월 2019, 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