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시기는 허영심에서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은총의 시기입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시온에서 뿔 나팔을 불어 단식을 선포하여라”(요엘 2,15)고 말합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의) 귀를 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단식을 선포하는 뿔 나팔의 시끄러운 소리로 시작됩니다. 때때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항상 서둘러 달려가는 우리의 삶의 속도를 늦추는 강한 소리입니다. 곧, 잠시 멈추어 서라는 호소입니다. “멈추십시오!” (이는 삶의) 근본으로 가라는, 곧 (우리의 마음을) 산만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것들에 관해 단식하라는 호소입니다. 또한 이는 영혼을 위한 경보이기도 합니다.
이 경종의 소리에 주님께서 예언자의 입을 통해 전하는 짧고 진심 어린 메시지가 동반됩니다. “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2,12).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와야 한다면, (이는 이미)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 시기는 삶의 길을 재발견하는 시간입니다. 모든 여행과 마찬가지로, 삶의 길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목표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여행 중에는 마을 풍경을 보거나 음식을 먹기 위해 멈추어 섭니다. 너무 멀리 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삶의 여정에서 나는 길을 찾는가? 아니면 단지 별 문제없이 살려고 생각하면서, 몇몇 문제들만 해결하려고 생각하면서, 약간 재미를 보며 살려고 생각하면서, 그날그날 살아가는 데 만족하는가? 길이란 무엇입니까? 아마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에 앞서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러나 언젠가는 그 또한 지나가고 마는, 건강에 대한 탐구입니까? 아니면 재물이나 풍족함입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나에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 여정의 목표입니다. 길은 주님 위에 놓여있어야 합니다.
길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오늘 우리에게 표징이 주어졌습니다. 머리에 재를 얹는 표징입니다. 우리가 머릿속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표징입니다. 우리의 생각들은 종종 왔다가 사라지는, 잠시 지나가는 것들을 따라가곤 합니다. 잠시 후 우리가 받게 될 얇고 가벼운 재는 우리에게, 조심스러움과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은 생각 안에 많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매일 그것들을 뒤쫓고 걱정합니다. 그런 생각들은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당신은 당신에게서 그 어떤 부유함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것들은 먼지가 바람에 날리듯 사라질 것입니다. 재화는 잠시 머물 뿐입니다. 권력도 지나가고, 성공은 기울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지배적인 현상, 다시 말해 외면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문화는 지나가는 것들을 위해서만 살라고 우리를 이끕니다. 이는 커다란 속임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불꽃이 꺼지면 그냥 재만 남을 것입니다. 사순 시기는 먼지를 쫓는 삶의 착각에서 벗어나는 시간입니다. 사순 시기는 즉시 불이 꺼지고 마는 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타오르는 불이라는 것을 재발견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시간입니다. 하늘의 영원함을 위한 것이지, 세상의 속임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의 자유를 위한 것이지, 재물의 노예가 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어느 쪽에 속해 있는가? 불을 위해 살고 있는가, 아니면 재를 위해 살고 있는가?
본질로 돌아가는 이 여정인 사순 시기에, 복음은 주님께서 위선과 거짓 없이 (우리가) 걸어 가길 요구하시는 세 가지 단계를 제안합니다. 곧, 자선, 기도, 단식입니다. 이것들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우리를 사라지지 않는 세 가지 현실로 이끕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다시 묶어 줍니다. 자선은 이웃과 묶어 주고 단식은 우리 자신과 묶어 줍니다.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고 우리가 투자해야 할 세 가지 현실은 바로 하느님, 형제들, 나의 삶입니다. 이것이 사순 시기가 우리로 하여금 바라보라고 초대하는 공간입니다. 수평적이고, 평범하고, 하느님을 잊은 채로 나 자신만을 찾는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기도를 통해 하늘을 향하는 것입니다. 소유하려는 허영심에서 벗어나는 것, 나에게 좋으면 모든 일이 다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선을 통해 (우리는) 이웃을 향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물질과 세상에 대한 애착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단식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기도, 자선, 단식은 지속되는 보물에 대한 세 가지 투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어느 방향을 가리킵니다. 방향을 찾고 있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자석과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뭔가에 집착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단순히 세상의 것들에만 집착한다면, 언젠가는 그것들의 노예가 됩니다. 사용해야 하는 대상들이 (우리가) 섬겨야 하는 대상들로 변합니다. 우리가 외모, 돈, 경력, 유흥을 위해 산다면, 그것들은 우리를 사용하는 우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매혹시키는 유혹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보냅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어지지 않는 것에 집중하면 우리 자신을 되찾게 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됩니다. 사순 시기는 허영심에서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여러 가지 중독에서 치유되는 시기입니다. 없어지지 않는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사순 시기의 여정 동안 우리는 어디에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십자고상에 시선을 고정시키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삶의 나침반입니다. 나무의 가난함, 주님의 침묵, 사랑을 위해 자신을 비우신 것은 우리에게 더 단순한 삶의 필요성을 보여주며, 우리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과도한 걱정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포기하라는 강한 용기를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추장스러운 무게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비주의의 촉수와 이기주의의 올가미로부터, 만족을 모르는 욕망으로부터, 가난한 이들의 필요에 닫힌 마음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타오르는 십자 나무 위에서, 세상의 재로 사라지지 않는 그분의 불타는 삶으로, 자선으로 타오르는 삶으로, 평범함에 빠지지 않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대로 사는 것이 어렵습니까? 네,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요구는 참된) 목표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사순 시기가 이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순 시기는 재로 시작하지만 마침내 우리를 부활절 밤의 불로 인도합니다. 무덤에서 예수님의 육신이 재가 되지 않고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으로 주님께 돌아온다면, 우리가 사랑의 길을 걸어 간다면, 꺼지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는 기쁨과 함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