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 앞에서는 그 어떤 가식도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님의 기도를 설명하면서, 예수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위선을 원치 않으신다고 강조했다. 이어 ‘주님의 기도’ 안에는 “나”라는 단어가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일반알현을 마무리하면서 “멀리 있는 이들”과 더 가까이 있는 이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주님의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6. 우리 모두의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는 그 어떤 가식도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더 잘 바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우리 여정을 계속 이어갑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는 세상을 피해, 우리 방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서, 하느님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는 위선자들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마태 6,5 참조). 예수님께서는 위선을 원치 않으십니다. 참된 기도는 양심과 마음 안에서 떼려야 뗄 수 없으며, 하느님께서만 보실 수 있게,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거짓을 피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가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권력을 가진 어떤 속임수도 있을 수 없으며,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양심을 적나라하게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가식적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의 근원에는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눈빛을 마주치는 것과 같은 침묵의 대화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서로 눈빛을 교환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바라보시게 내어 맡기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신부님, 저는 (기도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 (…)”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께서 자신을 바라보게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기도가 전적으로 친밀할 지라도 (개인적으로) 비밀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양심의 심연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자신의 방문 밖에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상황들, 문제들과 많은 것들을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으며, 모든 것을 자신의 기도 안으로 가져갑니다.

“주님의 기도” 본문 안에는, 매우 인상적으로 빠진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텍스트 안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빠진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에게 제가 물어본다면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 본문에)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 함께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기도” 안에 없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빠져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한 가지 단어가 없습니다. 우리 시대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단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매일 기도하는 “주님의 기도”에 누락된 단어는 무엇일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나”라는 단어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나”를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입술에 “당신”이라는 말을 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나’의 이름, ‘나’의 나라, ‘나’의 뜻이 아닙니다. ‘나’가 아닙니다. ‘나’를 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바로 “우리”로 넘어 갑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주님의 기도”의 두 번째 부분 전체는 1인칭 복수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굶주림을 채우기 위한 일용할 음식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청원마저도 모두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기도는 결코 아무도 ‘나’를 위한 빵을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고 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주시라고 기도하면서, 모두를 위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청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 안에) “나”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신) ‘당신’과 ‘우리’가 함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대화에서는 개인주의(individualismo)를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나’의 문제에 대한 과장이 없습니다. 형제자매 공동체들의 기도,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면 기도는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동체이며, 형제자매이며, “우리”라고 기도하는 백성입니다. 언젠가 교정 사목 담당 신부님께서 저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한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나’와 반대되는 말은 무엇입니까?” 저는 단순하게 “당신(너)”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당신’)이 전쟁의 시작입니다. ‘나’와 반대되는 말은, 모두 함께 평화가 있는 ‘우리’입니다.” (이것은) 제가 그 신부님으로부터 배운 아름다운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옆에 사는 사람들의 모든 어려움을 기억합니다. 저녁이 오면 그날 겪은 고통에 대해 하느님께 말합니다. 친구들뿐 아니라 적대적인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하느님 앞에 가져가며, 그들을 (자신의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위험스러운 존재로 몰아내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을 동정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익숙해져 있다면, 그의 마음은 어떻다는 뜻이겠습니까? 시들해졌다는 걸까요? 아닙니다. 더 나쁜 상태입니다. 돌 같은 마음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경우 주님께서 당신 영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시고,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주님, 제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십시오.” 참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주님, 다른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제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불행을 모르는 척 지나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육신과 영혼의 고통, 그리고 외로움을 느낄 때, 매번 어머니의 애끓는 마음과 같은 강한 측은지심(연민)을 느끼셨습니다. “측은지심/연민을 느낀다(sentire compassione)”는 매우 그리스도교적인 이 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측은지심(연민)을 느끼는 것”은 복음의 핵심 단어 중 하나입니다. 이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는 달리, 길가에 상처 입고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가도록 했던 마음입니다.

우리 함께 자문해 봅시다. 나는 기도할 때, 멀리 있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외침에 나 자신을 열어 두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더 평온하기 위해서, 기도를 일종의 마취제로 생각하고 있는가?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던집니다. 각자 대답해보시길 바랍니다. 이 경우 끔찍한 오해의 희생자가 될 것입니다. 당연히, ‘나’의 기도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우리”는 ‘나’ 자신을 혼자 평온하게 있지 못하게 하고, 나의 형제자매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에 앞서 그들을 먼저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와 죄인들을 위해 오셨습니다(마태 5,31 참조). 곧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의를 위해 일하면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십니다(마태 5,45 참조). 아버지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착하게 대하는 우리와는 달리, 항상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좋으신 분입니다. 이것을 그분에게서 배웁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성인들이든 죄인들이든 우리 모두는 같은 아버지로부터 사랑받는 형제들입니다. 인생이 저물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사랑했는지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단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복음의 규칙에 따라, 구체적이고 자비로운 사랑 말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13 2월 2019, 13:38